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차이
"자료 없이 회의를 한다구요? 보고서를 노션에 그냥 음슴체로 써도 되고, 마땅한 근거자료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회의에서 내 주장을 펼쳐도 된다구요? 그리고 제가 의사결정을 하라구요?"
체계를 갖춘 대기업에 비해 스타트업은 업무 보고, 의사결정, 회의가 널널하다는 인식이 있다. 나 또한 엄격한 양식의 보고서를 최소 1주 이상 작성하여 보고하거나, PPT 10장 이상을 만들어 회의하던 방식에 익숙했기에 스타트업에서 진행되는 회의와 보고가 처음에는 너무나도 '얼렁뚱땅'으로 여겨졌다. 윗 사람의 의사결정을 도울 수 있도록 서포트하던 역할에서 직접 의사결정을 해야하는 위치가 되자 '내가 이렇게 그냥 해버려도 되는건가?'라는 불안감이 생기기도 했다.
이처럼 대기업과 스타트업에서는 동일한 주제의 업무를 진행하더라도 진행 방식이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업무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 진행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보고, 그에 대한 의사결정 방식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회의, 보고, 의사결정이 다른 이유는 조직의 구조와 조직이 생존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조직 간의 하이어라키가 명확하고 조직 구조가 여러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제조업을 예로 들면, 제품의 성격에 따라 부문이 나뉘고 부문은 다시 제품군에 따라 사업부로 나뉜다. 사업부 내에는 조직의 역할에 따라 팀으로 나뉘고 팀 속에는 그룹, 파트, 셀이 또 여러 개 존재한다. 각 기업마다 하이어라키에 따른 조직명은 다를 수 있지만, 대기업에서는 5개 이상의 조직 하이어라키가 존재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리고 하이어라키 위로 올라갈수록 해당 리더에게 속한 구성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에 리더 입장에서는 의사결정을 위한 간단명료한 보고서가 중요하게 된다. 부문-사업부-팀-그룹-파트-셀의 구조라면 '팀장'은 300명 이상의 팀원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각종 회의에 참여해 의사결정하는 것으로 보내게 된다.
반면, 스타트업은 2~3단계의 구조가 일반적이다. IT 스타트업이라면 주로 비즈니스와 관련된 사업팀, 제품을 개발하는 프로덕트팀으로 구분되고 20명 이내의 규모일 때에는 사업팀 내에 마케팅, 세일즈, CS 담당자들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규모가 50명을 넘기는 시점에는 사람 한 명이 담당하던 업무들이 팀으로 생성되어 마케팅팀, 세일즈팀 등이 생긴다. 100명 이상의 규모가 되었을 때 본부-팀-파트 등 3단계 구조가 생기기도 하지만, 팀장급에게 구성원이 10명 이내로 구성되고 팀장 또한 실무를 병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특성에 기반해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의, 보고, 의사결정의 차이를 나름대로 분석해보았다.
대기업에서 회의에 참여할 때에는 주로 '정보 공유'를 위한 회의가 많았다. 특정 업무를 진행하고자 할 때 해당 업무를 인지해야 하는 다양한 유관 부서가 존재하기에, 유관부서에 정확한 업무의 내용과 프로세스를 전달하고 관련된 협조를 요청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료로 대체할 수 있지만 직접 말로 전달하는 편이 '제대로 인지했는가?'를 확인하기에 좋고, 향후 윗선에 보고할 때에도 '제대로 진행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공유이더라도 주로 회의를 진행하게 된다. 물론 대기업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나 업무의 경우, 스타트업 대비 투입되는 인원이나 비용의 규모가 큰 편이고 기간도 길기에 업무를 더욱 잘 수행하기 위해 공유를 목적으로 하더라도 회의로 진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기업 재직자의 TMI - 회의만 하다가 하루가 다 간다]
B2C 마케팅을 총괄하는 부서에서 일했던 시절, 품목 담당/지원팀/디자이너 등 유관부서가 많은 부서였기에 하루에 참가하는 회의의 수가 2~3개는 필수였다. 매 주 월/목에 진행되는 부서 회의,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따라 유관부서별로 논의하는 회의 등 심한 경우에는 하루종일 회의만 하기도 했다. 단순 회의 참여자가 아닌, 회의 주관자인 경우가 많았기에 회의 자료를 만들고 회의록을 작성하고 액션아이템을 정리해서 분배하는 등 회의를 위해 들어가야 하는 리소스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결국 일을 진행해야 하는 사람도 나였기에 일은 점점 늘어났다. 꼭 이렇게 유관부서가 많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대기업에서는 주 단위의 부서회의가 보통 2개, 월 단위의 조직 회의가 2개, 그 외에 각종 공유를 받기 위해 필참해야 하는 회의들이 있어 회의가 많은 편이다.
반면, 스타트업에서는 정보 공유를 위한 회의는 자료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해내야 하는 업무의 범위가 넓고 다양하기 때문에 정보성 회의가 수시로 진행될 경우 실무를 할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의는 주로 의사결정을 위한 자리로 활용된다. 현황을 간단하게 공유하거나 자료로 대체한 뒤 '그래서 뭘 할건데?'에 대한 아이디어와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논의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쏟는다.
스타트업은 대기업 대비 리소스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에 직접적인 관련자가 아니면 회의 참석자로 초대하지 않는다. 회의 중 논의가 지지부진해지거나, 더 많은 리서치를 진행한 후 다시 논의를 진행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되면 예상 시간보다 이르게 회의가 종료되기도 한다. 불필요하게 회의 시간을 채우려 노력하지 않고 회의에서 무조건 의사결정을 이끌어내려 하지도 않는다. 혹은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의 집중도가 저하된다고 느껴지면 더 나은 회의 방식을 찾기 위한 고민을 한다. 회의가 최대한 '효과적으로', '의도에 맞게' 진행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스타트업 재직자의 TMI - 너무 당이 떨어져요]
대기업에서는 공유성 회의도 많았고 내가 주요 실무진이 아닌 회의에 참석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주최자가 아닌 이상 50%정도 멍을 때리다 오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러나 스타트업 회의는 내가 필수 참여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회의시간 내내 높은 집중도를 유지하며 타 구성원의 주장을 검토하고, 내 의견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따라서 회의가 종료된 후 소진되는 에너지량이 대기업에 비해 큰 편이다. 유독 스타트업에서 회의만 끝나면 당이 떨어진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마 이러한 차이 때문인 듯 하다.
대기업에는 '글쟁이'라고 부르는, 일명 회사의 보고양식에 통달한 실무진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상사가 더 윗선에 보고하고자 하는 내용을 '기깔나게' 적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글 실력 하나 만으로도 빠른 진급을 하고는 한다. 해당 사례에서 느낄 수 있 듯, 대기업에서는 '양식에 맞춘 보고서 작성'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 내에 통용되는 보고서 양식을 통일함으로써 보고서의 핵심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고, 궁금한 점이 있는 경우에도 보고서의 양식에 따라 향후 살펴보아야 하는 위치를 빠르게 찾는 등 효율적인 보고 및 의사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고서 양식에 맞춰 간결하게 그러나 핵심 내용을 정확히 담아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쏟는다.
[대기업 재직자의 TMI - 대기업의 보고서 구조]
보통 보고서 1장에는 (주장 중심의 한 줄, 해당 주장을 뒷받침하는 1~2개의 문장, 표/그래프/이미지 등 구체적인 자료)로 구성되는 세트가 1~2개정도 들어가는 편이었다. 더욱 자세한 현황이 필요한 경우에는 '별첨'을 활용해 자료를 첨부하며, 별첨이 설명하고자 하는 단어나 문장 위 혹은 아래쪽에 *[별첨1] 참고 등을 표기해 필요시 별첨에서 세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반면 스타트업에서는 양식에 얽매이기 보다는 속도를 중시한다. 직관적으로라도 어떠한 주장이 발생했다면, 한 두가지의 근거만을 토대로 우선 보고를 진행한다. 혹은 근거가 없이 '그냥 느낌이 그래요'여도 상관없다. 근거를 찾고 보고서를 적는 시간을 들여 보고 타이밍을 놓치는 것보다는, 감에 의존한 것이더라도 빠르게 공유하는 것을 미덕으로 본다. 스타트업에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 누가 빨리 적응하느냐에 따라 생존 여부가 결정되며, 주장을 토대로 함께 의논하면서 어떠한 부분에서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탐구하는 것에서도 모두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재직자의 TMI - 스타트업이 첫 회사인 신입사원들에게]
대기업에서는 보고서 작성에 1달 넘게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단어 하나를 두고 증가, 상승, 상향, 확대 등 여러 가지를 검토하고 몇 번씩 수정한다. 반면, 스타트업에서는 양식이나 워딩에 얽매이기보다는 의도가 전달될 수 있도록 빠르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업무적 용어, 격식있는 용어를 쓸 일이 많이 줄어든다. 그렇다보니 스타트업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한 경우, '공식적인 글 작성 능력'이 다소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도 그 역량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도 않고 가르쳐줄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글을 잘쓰는 것'은 어느 회사, 어떤 위치에 가더라도 중요한 역량이라고 느꼈기에, 개인적으로라도 공무원 스타일, 대기업 스타일의 보고서를 써보면서 주장을 기반으로 논리를 펼치는 보고서 글쓰기를 시도해보면 좋겠다. (시작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편하게 댓글이나 메일 등으로 문의 주셔도 좋아요!)
대기업은 일반적으로 '윗선'에서 결정이 내려진다. 마케팅팀을 예로 들었을 때, 이번 주에 발행하는 SNS 이미지를 보라색으로 할지 민트색으로 할지에 대해서 윗선에서 결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올 해에는 SNS 마케팅을 좀 다양하게 시도해보도록 하지'와 같은 방향성이 윗선에서 결정된다. 심지어 구체적으로 특정 SNS를 찝어서 내려오기도 한다. 전혀 제품의 색과 맞지 않는 SNS이더라도 이미 상부에서 결정한 사안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은 거의 없다.
더불어 대기업에서 만들어진 '상부'의 결정 사항은 마치 심장에서 생성된 피가 온 몸의 혈관을 타고 쭉쭉 뻗어나가 듯, 복잡한 하이어라키를 가진 조직도 속에서 아래로, 아래로 전달된다. 조직 구조가 복잡하다보니 '건너 건너' 업무를 전달받게 되어 해당 업무가 발생하게 된 구체적인 배경을 알기 어렵다. 따라서 실무진들의 전달받은 전략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전략을 수정하는 것 또한 어렵다.
반면 스타트업은 '현장'에서 결정을 내리는 일이 많다. 이는 경영진의 승인없이 일을 진행한다는 의미가 아닌, 실무 담당자가 진행 방향을 제시하고 제시한 의견이 대부분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에 가깝다.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일수록 경영진들이 다양한 직무의 리더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렇기에 각 직무별로 경영진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은 물리적으로 매우 적다. 따라서 해당 업무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실무자가 앞으로의 전략에 대해 제안하는 경우가 많으며, 논리적으로 충분히 진행해도 좋을 아이디어라면 대부분 승인된다. 물론 스타트업에서도 하향식으로 전략이 전달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무진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그들을 설득하거나, 혹은 실무진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략을 수정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이는 조직 구조가 단순하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경영진이 진행하고자 하는 전략을 전체 구성원을 모아놓고 선포할 수 있으며, 실무를 담당하는 구성원이 경영진과 직접 소통이 가능하기에 전략에 대해 궁금한 점을 직접 질문을 할 수 있는 규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기업과 스타트업은 기업의 규모, 연력, 체계성과 기업 존속을 위해 필요한 행동이 다르기에 보고, 회의,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물론 모든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꼭 이러한 양상으로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나, 대체적으로 유사한 경향성을 보이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대기업과 스타트업 중 어떤 곳에 재직할지 고민이 된다면 이 글을 참고해 자신의 성향에 더 적절한 조직을 고르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