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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Oct 17. 2021

전남친 파스타

"자기야, 오랜만에 지나(Gina)랑 인사해."

지나(Gina)가 누구냐고요?  고랑이의 전 여자 친구도, 여동생도, 누나도 , 여자 사람 친구도 아닌, 지나는 바로 제가 연애시절 고랑이에게 선물로 사준 파스타 머신입니다. 연애 초반에 그가 한때는 잘생기고 배가 좀 덜 나왔던 시절 이탈리아 할머니(논나)에게 배웠던 생면 파스타를 만들어주겠다는 말에 제가 선심 쓰듯 아는 친구를 통해지나를 구매하여 고랑이에게 선물했었거든요. 저희 둘 다 바쁘다는 핑계로 참 만나기 힘들었던 지나. 먼지가 제법 쌓인 누런 박스를 꺼내자 여전히 반짝이는 모습으로 지나가 인사를 합니다.


저는 제법 일이 바빠져서 정신없이 일을 하는데, 주방이 시끌시끌합니다. 싱크대 귀퉁이에 달걀을 깨는 소리가 여러 번 들리고, 포크가 스테인리스 볼에 부딪치는 소리 부스럭부스럭 밀가루 종이 포장지가 움직이는 소리, 가루류를 보관할 때 집 어두는 클립의 아귀가 맞는 소리... 여러 소리가 들리더니, 반죽이 싱크대 위쪽에서 팅팅볼같이 구르듯한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 랩을 자르는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점심시간에 나와보니, 밀가루와 세몰리나 가루가 주방 바닥에 싸리눈 처럼 퍼져 있습니다. 청소기를 쓰윽쓰윽 돌리며 점심거리를 찾아볼까 싶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계란 흰자가 밥그릇 가득 채워져 냉장고에 있습니다. 계란 노른자만큼 노오란 황금색의 파스타 반죽 몇 개도 그 옆에 있습니다. 오늘 저녁은 파스타인 거 잊지 말라며, 점심을 가볍게 먹는 게 좋겠다고 조잘조잘 고랑이가 말합니다.


몇 시간 뒤, 타당 타당 반죽 모양을 잡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르륵 거리는 지나의 경쾌한 소리가 들립니다. 오랜만에 일을 하는 지나는 잠시 버벅거리며 면 반죽을 늘려주더니 고랑이와 함께 시원하게 주욱 노란 황금색 긴 종이 같은 면을 뽑아냅니다. 중간중간 밀가루와 세몰리나는 뿌려준 뒤, 다시 원하는 면 굵기에 맞게 지나의 등부분에 날을 잘 고정시켜줍니다. 


파스타를 말리는 나무 걸이가 없지만, 나무 스푼 뒷부분을 이용해 잘 뽑아낸 면을 받아 들어 모양을 잡아줍니다. 세몰리나를 약간 뿌린 뒤, 적당히 가느다란 스파게티 면발과 제가 좋아하는 혀에 감기는 식감이 좋은 페투치니까지... 옆에서 조용히 사진을 찍던 저는 뱀또라이를 틀듯, 상투를 틀어 면발로 장난을 쳐봅니다. 왼쪽 얼굴이 따끔거려서 옆을 돌아보니 고랑이가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쯧쯧쯧...'하고 혀를 차는 모습에 씩 웃어봅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도톰하게 썬 베이컨에 마늘과 살짝 매운 고추로 기름을 내어 베이컨의 끄트머리가 바삭하게 구워지도록 냄비 바닥이 지글지글 소리가 들려옵니다. 평소에 잘 먹지 않지만, 부드러운 크림을 넣어보기로 해서 크림을 넣고, 옆 냄비에서는 오늘 지나와 함께 만든 생면 파스타를 훅 다이빙을 시켰다가 빠르게 건져냅니다. 


생면 파스타는 일반 건면 파스타보다 조리시간이 짧기 때문에 양쪽 냄비를 매의 눈으로 바라보며 본격적으로 파스타를 완성할 마지막 준비를 합니다. 잘 구워진 베이컨 향과 향긋한 마늘향이 잘 어우러진 크림소스에 파스타 면을 바로 비벼, 면수와 넣어 파스타가 소스를 잘 머금도록 합니다. 마지막으로 양껏 갈아주는 치즈와 계란 노른자를 잔열로 비벼주면 완성. 아, 후추를 빼놓으면 서운할 테니 맛있게 뿌려줍니다. 제법 오래 숙성된 파르마산 치즈의 향이 코끝을 탁 치고 들어와 날카롭게 맴도니 제법 파스타를 만들어먹는 기분이 납니다.

어릴 때는 이런 크림 파스타를 무척 좋아했던 기억을 더듬어 포크에 숟가락을 부딪치며 면발을 휙휙 돌려가며, 파스타 끄트머리를 호로록 쫍! 먹어보는 장난을 쳐봅니다. 입가에 맴도는 고소함과 짭조름한 맛이 끝날 때쯤 치아와 혀에 남는 여운과 식감이 좋은 고랑이표 생면 파스타. 지난번 명란으로 맛깔나게 맛을 내어 저에게 별점 만점을 받았던 파스타도 맛있었는데, 오늘 파스타는 정성을 봐서라도 별점을 두둑이 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전 남친이 된, 고랑이는 으르렁거리고 싸워도 제 옆을 지키는 제 편이 되었고, 락다운이 아니었으면 아마 몇 년은 만나기 힘들었을 지나와 고랑이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이 맛있는 솜씨에 감사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해봅니다. 기름진 음식을 먹은터라 소화를 시킬 겸, 페퍼민트차를 두 잔을 따뜻하게 준비해 창가에 앉아 제법 길어진 해가 눈에 조금 더 오래 담기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우리는 이 파스타 한 그릇으로 무슨 대화를 그리도 길게 한 걸까... 대화의 맥을 되짚다 보면 저도 가끔은 궁금합니다. 생각해보면 저희 둘은 늘 똑같은 말투와 비슷한 내용을 말하며 사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함께 산다는 것은 닮은 듯 또 닮지 않은 두 사람이 맛있게 먹은 아는 그 맛을 또 맛보고, 재미있게 본 영화를 또다시 재미있게 보는 것이 함께 산다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남은 반죽을 곱게 접은 뒤, 일정량을 나누어 랩으로 밀봉하여 냉장고 옆칸을 차지한 보송보송한 방석 모양의 반죽에 눈에 잠시 머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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