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자마카롱 Jun 11. 2020

얼그레이 스콘으로 시작된 티타임

20년만에 처음 일을 쉬게 된 고랑이, 10년 만에 숨 돌리고 있는 나

지난 3월 초. 직장에서 메일이 날라 왔습니다.

' 오늘부로 모든 쉬프트는 조정 및 취소됩니다. 확정된 추후 일정은 없습니다.'

사실 작년 말에 근무 중, 허리를 한번 다친 이후로 일을 가는 게 어려울 정도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짬을 내어 한국에 급히 치료를 받고 간간히 일하는 쉬프트로 지내고 있는 중이었지만, 

이렇게 코로나 바이러스로 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리고 몇 주 뒤, 연달아 고랑이의 직장에서도 당분간 회사를 닫겠다는 말과 함께 언제 다시 재개할지 모른다는 통보. '다음 주부터 급여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불안감과 '앞으로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 채,

집에서 얼굴만 간신히 보며 저녁을 함께 먹던 고랑이와 24시간 집에만 붙어있게 되었습니다.


새벽 4시, 좀비처럼 늘어져있던 몸을 온 힘을 다해 일으키는 기상에서 아침 8시쯤 일어나 먼저 일어난 사람이 고양이들(소주, 맥주)의 밥을 주고  토스트와 커피 냄새로 침대에 남아있는 사람을 깨우는 일상으로 바뀌기 시작한 지 약 3개월째.




 두 번째 티타임: 오후 12시 30분-1시 사이. 머리끝까지 달달 해지는 과자와 커피 혹은 티를 내려서 마십니다.

 저는 핸드드립 한 커피, 그리고 남자 친구는 모카포트에 커피를 우려서 아마레띠(이탈리아 과자)와 마신 날.


일할 때는 하루에 수백수천 개씩 구워내다 보니 쳐다도 보기 싫었던 스콘.

마땅히 디저트류를 살만한 가게가 없어서 이렇게 집에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만들었던 얼그레이 스콘에 버터와 유자청. 고랑이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





'티타임과 함께 무엇이 달라졌을까?'


1. 고랑이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자주 싸우고, 금방 화해합니다.

저희 커플은 2년 정도 연애하고, 남자 친구의 이직과 도시 이동으로 함께 작년부터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서로 새 직장에서 바쁘다 보니 하루에 자는 시간 외에는 두 시간 정도 볼까 말까 했어요.

쉬프트가 매주 서로 다르다 보니 같이 데이트할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적었는데, 

갑자기 24시간 붙어있다 보니 정말 별거 아닌 걸로 자주 투닥투닥.

(컵을 제대로 안 씻었다 , 또 화장실에 불 끄는 것을 깜박깜박했냐..... 이유는 많죠.)

그러다가도 티타임 시간쯤 되면, 알아서 먼저 화해의 몸짓으로 차를 우리고, 달달한 과자를 꺼내면서

앉아서 대화를 하다 보면 언제 싸웠나 싶고, 별별 이야기를 다 합니다. 어릴 때 좋아했던 간식거리, 이상한 습관...


2. 제 고객들이 즐겼을 경험들에 대해,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제가 일하던 곳은 워낙 큰 업체다 보니 무언가를 만들면 수백수천 개 대용량으로 만들게 되고, 

고객들을 직접적으로 볼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가끔 '제가 만들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즐거움'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잃게 되곤 했습니다.

 다행히 다니던 직장들은 좋은 재료와 제품으로 잘 관리하고 보기 좋고 만드는 사람들 에게도 

맛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바쁠 때는 주어진 그냥 일 자체에 집중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편히 앉아서 제가 스스로 만든 디저트와 티를 먹고 있으니 내가 놓치고 있는 시선이 이거였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자 친구의 빠에야를 맛있게 먹은 대가로 그린 손그림 레시피.


3.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무려 두 명의 셰프(?)가 살고 있지만, 

출퇴근이 워낙 이르거나 늦기 때문에 사실 저희가 먹는 음식은 빠르고 간단하면서 

먼저 퇴근한 사람이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뚝딱뚝딱 만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과 달리 호주는 각자 런치박스를 싸서 출근하기 때문에, 

저녁과 동시에 다음날 런치박스를 2인분씩 준비해야 하니 

시간과 정성이 많이 깃드는 음식들은 할 기회가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오후 티타임 때, 남자 친구와 저녁에 어떤 음식을 만들지, 

서로 어떤 부분들을 돕고 분배할지, 

다음에 장을 볼 때는 어떤 재료를 어떻게 쓸지 이야기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육수가 준비 과정은 티타임 끝나고 같이 하기도 하고요. 

최근에는 남자 친구가 정말 하루를 공들여서 빠에야를 만들었습니다(최고였어!)



4.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감사하고 연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티타임을 가지면서 누군가와 오래 대화를 하게 되다 보니, 보고 싶은 사람들이나 

예전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특히 음식은 누군가와의 추억이 깃들어있는 경우가 많아서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메신저나 전화를 하게 되네요. 거리감이 주는 고마움도 있겠지만, 

나이 들면서 사람 관계라는 게 한정되고 해외 생활이 길 수록 사람이 무서워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 매일매일 내가 사는 일상으로도 바쁘고 지치게 됩니다. 

오래간만에 티타임 중 생각난 친구와 쑥쑥 크고 있는 친구네 아이들 동영상도 주고받고, 

엄마가 어렸을 때 해주던 돈가스가 갑자기 생각나서 메신저로 엄마의 레시피 팁을 여쭤보기도 하고-

 작지만 주변 사람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상이 가져다준 변화들.

코로나로 인한 '쉼'이 아직은 두렵지만, 또 감사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예쁘고 흠 없는 사진보다 이런 사진이 좋은 이유는 무얼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