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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Aug 08. 2020

첫 번째 편지, 사실은 아빠가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은 자기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삶이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 중) 


사실은 아빠가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첫 기일이 다가올 쯤에야, 이젠 제 인생을 제 맘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미친 듯이 달려갔건만, 5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이미 10분 전 이 세상을 떠난 싸늘한 모습인 채 

저를 맞이하셨고, 그런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길은 너무도 험해서, 그렇게 저는 사계절 내내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지고 나서야 제 마음 하나, 제 몸 한 구석을 돌아볼 수 있었거든요.


아빠는 늘 바쁘고 출장이 많은 분이셨어요. 1년에 한 네다섯 번쯤이나 얼굴을 마주하고 저는

아빠와 밥을 먹을 수 있었어요. 저는 애교나 귀여운 구석 없는 무뚝뚝한 첫째 딸이었지만, 

그래도 아빠는 늘 출장 갔다가 돌아오시면 제 책상 유리 밑에 세계 각 나라의 지폐와 동전들을 

조심히 깔아주곤 하셨어요. 특히 유난히 긴 미국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아빠는 제가 좋아하는 온갖 캐릭터들이 살고 있다는 디즈니랜드라는 곳에서 사 온 파랗고 보라색 조개 모양과 구슬이 달린 인어공주 목걸이, 빨주노초 알록딸록해서 더 사랑스러웠던 S사의 워크맨, 오색빛깔의 반짝이가 바닷속에 휘몰아치듯 돌아다니는 물컵 등을 사 가지고 오셨어요. 그 모든 보물 같은 추억들은 꽤 오래 제 보물상자에 머물다가 갔어요. 그 후, IMF 위기가 와서 모두가 힘든 시절, 아빠 또한 회사를 나오셔야 했고, 술을 유난히 많이 드신 날에는 평소에 말이 그토록 없는 분이 밤새 영어로만 혼잣말을 하시곤 했어요. 저는 열아홉의 나이에 혼자 집을 떠나서도 나와서도 잘 사는 싹싹하고 씩씩한 여자애였지만, 동시에 엄마 아빠에게 참으로 모질고 독하기 짝이 없는 나쁜 계집애 이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제가 왜 미국을 처음 이 여행의 시작지로 선택했는지 저도 잘 몰랐어요.

사실 여행 준비를 하며 비행기 값을 검색하는데 발견한 미국행 티켓이 꽤 괜찮은 가격이기도 했고,

이젠 세상이 좋아져서 서류를 챙기고, 대사관에 줄 서서 비자를 받지 않아도 되니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저에게는 딱 맞는 곳이었죠. 서른이 되기 전에는 보러 가겠노라 호언장담했던 미국에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어요. 그 누구와도 일정이 맞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미국에서 이 여정을 시작해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비행기 표를 바로 끊었어요. 그렇게 시애틀을 거쳐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입국심사 줄을 기다리고 나서야 생각했습니다.

"사실 나는 아빠가 많이 보고 싶어서 이 곳에 왔구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너무나 날이 좋은 날 갔던 코잇 타워.

샌프란시스코의 숙소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힙한 분위기에 도심과 가까웠지만,

아침 공기에 밀려오는 마약 냄새와 노숙자들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정말 미국은 다들 총 하나쯤은 

들고 다녀야 하는 무서운 곳인가 싶었어요. 

그렇게 늘 덜덜 떨면서도 10분을 땀나게 걸으면 재미난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해요.

세계에서 가장 주차하기 어렵게 생긴 길에 참 아슬아슬하게 주차된 차들, 

차들이 거북이와 달팽이의 경주처럼 기어가는듯해서 혼자 슬며시 웃으며 지나간 롬바드,

픽사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살 거 같은 예쁜 집들이 가득 늘어선 경사들.

유명한 곳들이 참 많은 샌프란시스코이지만, 예쁘고 멋진 것을 넘어서서 지형과 문화,

개성이 적절히 조화된 주택가들을 걸을 때면 건축을 공부하는 친구 M을 데리고 오고 싶었어요.

정말 M은 그 녀석이 들고 다니는 작은 스케치북에 바로 이 집들을 살아 숨 쉬는 듯하게 담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이 골목길들만 걸어 다녀도 저절로 공부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저는 여전히 뚜벅이라 몇 시간을 그렇게 사이사이 골목들을 발로 딛고 다녀보다가 지치면, 전날 빵집에서 사 온 커다란 빵 한 덩이를 손으로 뚝 잘라와 오물거리며 가고 싶었던 초콜릿 가게에서 사 온 초콜릿 하나를 먹으며 다시 걷곤 했어요. 그러다가 배가 정말 고프면, 크지는 않지만 유학생들에게서 맛있다고 소문난 햄버거도, 정말 미국 사이즈인데도 맛있어서 결국은 스푼에 묻어있는 마지막 한입까지 먹게 되는 클램 차우더 수프를 하나씩 사 먹기도 했고요.


만약 제가 집을 사게 되면 이렇게 기분 좋은 공간을 두고 싶다 생각했던 누군가의 집 현관.
어렸을 때, 바람이 유난히 많이 들어오는 방문 앞에  무거운 사전을 두곤 했던 기억이 생각났어요. 
햄버거를 안 좋아하는 저도 하루에 하나쯤 즐겨먹을 수밖에 없었던 정말 맛있었던 햄버거. 

그림과 그리움

가다가 무서워 보였지만 무심한 듯 시크한 표정을 지어주는 이 동네 잘생긴 갈매기와 사진을 찍기도 하고, 

사고 싶을 만큼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을 발견한 갤러리에서는 친구에게 결혼 선물을 할만한 그림을 찾고 있다고 말했더니, 갤러리 벽 쪽에 숨어있던 그림을 안내받기도 했어요. 야쟈수 같은 큰 나무 아래에서 학생들 틈에 껴서 콜라 한잔을 마시기도 했고, 묵직한 나무와 종이 향이 느껴지는 시티 라이트라는 서점에서는 제가 어렸을 때 재미있게 본 물리학자 파인만 씨의 책을 발견해서 저만의 샌프란시스코 기념품으로 서점에서 파는 엽서와 함께 사 왔어요. 마지막 날에는 무엇을 할까 하다 드영갤러리라는 미술관에서 하루 종일 보고 싶은 그림들을 보고 난 후, 그래도 첫 여행도시인데 며칠 저녁값을 아낀 대신 , 전망이 좋은 호텔에서 그래도 칵테일 한 잔 하면서 이 도시에서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어요.


책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면 꼭 데려오고 싶었던 시티 라이트 서점.
제가 본 갈매기 중, 이 동네에서 가장 잘생긴 갈매기

우버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 아세요? 그 당시에 한국에서 신문기사로만 봤던 서비스가 궁금하기도 하고, 며칠 돌아다니다 보니 우버 본사 앞을 지나게 되는 일이 있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버를 이용해 보기로 했어요. 피곤함과 땀에 조금 절어있는 며칠간의 일정을 정리할 겸, 제일 좋아하는 원피스와 진주 귀걸이,

여행 전 친구가 챙겨주었던 머플러와 작은 반지를 끼고 해가 지기 시작할 때쯤 우버를 타고 호텔로 향했어요.

우버 기사 아저씨는 남미 악센트로 기분 좋게 저의 여행을 응원해주며 호텔로 데려다주었고, 저는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샌프란시스코 야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호텔 바로 올라갔어요. 오래된 호텔이 주는 따뜻함과 

차분함에 조금 긴장이 풀려서 바 자리에 앉아서 마티니 한 잔을 하는데 얼마 전에 어디선가 보았던 글이 생각났어요. '그림이라는 단어가 그리움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그 말을 곱씹어보며, 그저 창 밖의 석양에 더 반짝반짝한 도시의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어요.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지막 날 밤을 축제로 만들어 준 밴드.
저는 이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요?


"그냥 너랑 말이 하고 싶어서-"라고 저에게 말을 건넨 남자. 그는 모 기업 일하면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트레이닝을 담당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서글서글한 인상에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한국을 가본 적은 없지만 '안녕하세요'라는 표현을 자신의 한국인 직원에서 배웠다고 말했어요. 제 긴 여정에 관심을 가지며 끊임없이 질문을 하다가 서로의 생활과 연애관에 대해 말하게 되었어요.

그는 일 년에 200일 정도를 출장을 다니고 있었고, 그 생활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누군가를 깊게

만나는 것은 포기했다고. 운명 같은 건 없더라-라고 말하는 그에게 저는 물었어요.

"그래도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단 한 사람의 사랑을 원할 거야? 아님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원할 거야?"


그와 한참 재미있게 이야기를 했고, 바 뒤쪽에서 연주하는 밴드의 음들이 더 고조될 때쯤, 다른 곳에서 한잔을 더 하면 어떻겠냐고 그는 제안했어요. 저는 다음날 아침 뉴욕 비행 일정이 있다고 말하며 그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눈앞의 아름다운 야경을 눈에 꼬옥 담았어요. 그렇게 어둠 속에서 도시의 빛을, 사람의 눈빛을 기다리고 바라보는 순간, '운명'이라는- 그 익숙하고도 낯선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다 아끼던 반지 하나를 잃어버렸고, 자꾸만 눈이 뜨거워져 어둠만 바라보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그날 밤. 그날 밤이 멀어지는 오늘 밤에서야 이 편지를 부쳐봅니다. 저는 이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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