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편지, 금빛으로 빛나는 햇빛

by 유자마카롱


34.JPG 서울, 한국 (엄마의 손은 외할머니의 손을 닮았고, 주름이 매년 늘어가는 사진에 마음이 짠해지곤 해요.)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함께 먹으며 서로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가운데 놓고 그것의 밑바닥을 함께 보는 일이다." (박칼린, ‘사는 동안 멋지게’ 중)



35.JPG 프라하, 체코 (정말 햇빛이 금빛이고 보석같았던 시간의 한 장면 입니다)



"햇빛이 금빛으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걷는다는 일,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



36.jpg 멜버른, 호주 ( 커피향이 퍼져있는 멜버른. 참 매력적인 도시예요.)



"같이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닮아간다.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주고 무언의 대화 상대가 되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깨달음을 준다." (성석제, ‘내 생애 가장 큰 축복’ 중)



37.JPG 시드니, 호주 ('Frangipani' 라는 꽃이예요. 파란 물과 참 잘어울리는 꽃인데 저희집 마당에도 키워요.)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중)



38.jpg 빈, 오스트리아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림을 보러갔다가 또 다른 그림을 만났어요.)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만으로 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장 그르니에, '섬'중)



39.JPG 스트라스부르그 , 프랑스 ( 벼룩시장에 놓여있던, 열쇠꾸러미. 어떤 문을 열 수 있을까요?)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중)



40.JPG 부산, 서울 ( 16년지기 친구들을 데리고 함께 갔던 여행이예요. 부산은 참 늘 마음이 편해지는 도시예요.)



"길 없는 어둠을 걷다가 별의 지도마저 없다고 주저앉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지금 간절하게 길을 찾는 너에게로 빛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니" (박노해, '별은 너에게로')



41.jpg 로마, 이탈리아 ( 달빛과 별빛과, 그 빛에 더 빛나는 천사들이 모여있던 장소)



"앞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험난한 길이 남아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1973년 6월 3일 밤, 저자. " ( 박경리 선생님이 1973년 6월에 쓰신 ‘토지’ 서문 중)



R0008317.jpg 매일매일 메뉴가 다른, 메뉴판 없는 베로나의 한 작은 식당.


할머니, 어제부터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베로나에 머물고 있어요. 여기는 마트에 파는 붉은 토마토마저도 예쁜 보석같이 빛이 나고, 손잡고 다니는 연인들이 유난히 많아서 살짝 부러운 도시예요. 그래도 혼자 씩씩하게 큰 캐리어를 낑낑 끌고 종이지도를 손에 쥔 채, 머물기로 한 이탈리아 할머니(논나)의 초록 대문집으로 향했어요.

환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할머니 생각이 나서 몇 달 동안 배운 띄엄띄엄한 이탈리아어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어요. ' 너의 블라우스에서 여름이 보여.'라고 했더니 그녀는 '너는 이탈리아어를 예쁘게 쓰는구나.'라고 웃으며 말하더니 거북이 모양의 열쇠고리가 달린, 영화에서나 봤던 옛날 열쇠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하게 걸어 제가 사용할 화장실, 방문, 현관문을 하나씩 그녀와 함께 열어보고 잠가보는 연습을 했어요. '그저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시간을 들여서 열고 닫으면 된다'는 그녀의 말에 이곳은 시간을 속도가 아닌, 그저 온전한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돼요. 할머니는 저에게 계절을 알려준 스승이었듯이,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이탈리아 할머니는 저에게 온전한 시간을 알려주네요. 할머니들은 참 마법사 같아요.

이 로맨틱하고, 느릿하며, 정감 가는 도시에서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을 만큼 저는 시간을 배우고, 계절을 배우며 잘 지내고 있어요. 오늘 밤에는 할머니가 보면 좋아하셨을 빨간 모자와 민트색 바탕에 파랑새가 그려진 원피스, 은은하지만 예쁜 진주 귀걸이와 누군가가 춤을 청하면 바로 춤을 출 수 있을 편하고 예쁜 신발을 선반에 준비해 두고 잠을 청해 봅니다.

누가 알겠어요. 이 도시에서 저와 마음의 속도가 맞는, 함께 계절을 느끼는 법을 배워갈 누군가를 내일 만날 수 있을지도요. 편지를 쓰다보니 할머니가 제 손에 조용히 쥐여주시던 잘 익은 살구냄새가 손에서 나는것 같아요. 보고 싶어요.
-막내 손녀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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