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부림 1] 내 몸부림은 무엇에 대한 몸부림인가

꿈의 회사에서 남은 건 동태눈 뿐인 건에 관하여

by 변호사 G씨

꿈꾸던 직장에 다닌지도 어느새 1년이 지났다.

어린 시절 막연히 외고에 진학하며 써낸 장래희망에 자리하던 그 꿈 하나를

마침내, 우연히, 이루게 되었다는 기쁨을 만끽하던 것도 어느새 흐릿해졌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건, 흐릿한 어린시절 꿈과, 조금의 자부심, 그리고 몸부림이다.

이 몸부림은 무엇으로부터의 몸부림인걸까?




시작은 정말 설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연히 보게 된 채용 공고에 너무도 심장이 기쁘게 뛰었고,

정확히 뭐 하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꿈꿔왔던 어린 날의 꿈 한 조각을

드디어 내 손에 거머쥐게 되는 것만 같았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지원서를 작성하였고,

지원서를 작성하는 내내 이 일은 정말 딱 나를 위한 것이야! 라고 느낄 정도로

거슬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지금껏 걸어온 인생 길이 다 이 일을 위해 놓여왔던 거라 느껴졌고,

작은 인맥 하나, 작은 경험 하나도 모두 나를 이 일에 떠밀어 보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합격 연락을 받았을 때 믿기지 않게 기뻤고, 속 시원했고,

이제 나의 모든 진로 고민은 끝이구나-하는 안도감을 난생 처음으로 느꼈다.

대학교 2학년, 파리에서 외로운 교환 학기를 보내면서

"진정 가슴 뛰는 일을 하게 해주세요"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2024년 12월, 꿈꾸던 이곳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1년 하고도 몇달이 흘러 2026년 1월,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을 바라보는 내 눈빛은 이전의 꿈과 설렘은 찾아볼 수도 없이,

그저 하루 빨리 도망쳐버리고 싶은 공허한 도망자의 그것과 같을 뿐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라고 물으면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많은 일들, 내 눈에서 빛을 모두 빼앗아 가버리고 이곳에서의 미래를 그리고 싶지 않게 만들어버린 많은 사건과 정황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지금의 내 몸부림을 만든 건 단순히 그 일들의 종합만은 아니리라.


그럼 대체 뭐가 문제냐 - 하면 그 대답부터 하는 건 더 어려우니까

그 많은 일과 사건들 부터 털어놓고 시작하자.


우선, 입사와 동시에 미국의 국제 원조 대폭 삭감과 국제적인 다자주의의 약화, 다자 협력의 위기 및 국제질서의 파편화로 인해 조직이 갖는 위상과 기능할 수 있는 역할이 크게 축소되는 거시적 흐름 변화가 있었다.


대체 그런 거대한 큰 차원의 변화가 국내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일개 사무직원인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그 거시적 변화는 마치 커다란 도미노가 거꾸로 쏟아지는 것 같은 직접적인, 그리고 파괴적인 영향을 나에게까지 미치고 말았다.


{B807C054-4EEA-4843-A028-3D611366F016}.png <정말 재미있게 읽은 The One Thing에 삽입된 그림인데, 나의 경우에 거시적 변화는 저 가장 큰 도미노가 오히려 가장 작은 나를 넘어뜨리러 달려오는 것과 같은 꼴이었다>


전 세계적인 원조 삭감은 곧바로 내 옆의 동료에게 영향을 미쳤다.

우리 사무실만 해도 여러 명, 전 세계적인 오피스 기준으로는 3분의 1에 달하는 인력이 감축되었다.

상황이 많이 어렵다는 발표가 공식적으로 직원들에게 안내된 3월 후 고작 수개월만의 일이었다.


동시에 사무실은 이사를 준비했다.

이건 거시적 흐름의 변화와는 또 다른 층위의 외부 요인이었는데, 원래 있던 사무실 건물이 다른 곳에 매각되면서 하는 수 없이 모든 입주사들이 이사를 가야만 했던 것이다.

사무실이 이사를 가는 건, 사람이 이사를 가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일이어서

우리 사무실은 새로 들어갈 곳에 입주가 가능해질 때까지 수개월을 임시 오피스에서 지내면서

전 직원이 두 팀으로 나뉘어 격일로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이 대대적으로 인력 감축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일개 직원인 우리들은 그저 검토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내 옆의 저 동료가 잘릴지, 내가 잘릴지, 오피스가 통째로 문을 닫을지,

내 퇴직금은 제대로 나올지, 보상금은 별도로 있는 건지 등등 궁금한 것 투성이인 채로

혼란의 봄이 지나갔다.


하필이면 이 때가 나의 경우에는 결혼 준비로 정신이 없던 시기와도 맞물려 있었는데,

3월 신혼집 계약과 대출 알아보기, 4월 가구 및 가전 알아보기, 5월 웨딩 촬영 및 신혼집 이사까지

정말 웬만한 일정의 평범한 직장인도 벅찼을 일이 내게는 위의 두 혼란과 함께 찾아왔던 것이다.




그래도 나에게는 바쁨이 약이었는지,

개인적인 일로도 바쁜 것이 너무 많다보니 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고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이고 - 하는 것들을 진중하게 고민하고 신경 쓸 겨를이 없이

혼란한 봄이 그저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동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그때 그렇게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동료들이

참 잘 한 일이고, 그들을 위해 잘 된 일이라는 생각에 기쁨의 축하를 넘치게 전할 법 하지만

그때 나는, 아직 구조조정의 결과를 듣기도 전에 퇴사를 결심하고 통보한 세 명의 동료들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낼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한 순간에 나는 입사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아 세 명의 동료를 잃었고,

팀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전혀 모르던 업무를 3배나 넘게 모두 떠안게 되었다.

그렇게 잔인한 여름이 왔다.




첫 몇 달은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급한 불을 조금이라도 꺼트리고,

몸을 두 배로 움직이고 세 배로 정신을 집중해서 남겨진 일들을 쳐내다 보면

언젠가는 이 모든 혼란이 끝날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사라진 세 명 중 적어도 두 명은 새로 채워질 거라고 믿었고,

기회가 되면 내가 그 중 한 명의 자리에 승진을 할 수도 있을 거라 (바보같이) 기대했고,

전문성이 있는 동료들이 채워지면 우리의 팀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서 다같이 일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는 업무도 기꺼이 받아서 했고,

처음 연락하는 사람들에게도 기꺼이 도움을 요청하며 어떻게든 일을 되게 하려 했다.

나도 모르는 내용으로 누굴 가르쳐야 한다는데, 그 짧은 시간 안에 내가 먼저 흡수하고 배우고 익혀서

최대한 도움이 되는 강의를 만들려고 안간 힘을 다 하기도 했다.

아, 물론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로지 남겨진 자료 쪼가리들과 구글 검색으로 공부한 것이었다.


별의 별 행사를 다 했고, 별의 별 연락을 다 돌렸고, 별의 별 사람들을 다 만났다.

9월, 내 결혼식이 오기 전까지 내가 어떻게든 이 저글링을 잘 유지만 해간다면 희망이 오리라 굳게 믿었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큰 사고 없이 9월 결혼식이 잘 끝났고, 신혼여행을 가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모든 희망이 부숴진 것은

신혼여행에서 복귀하자마자 그 주에 가장 높으신 분의 방한 일정에 정신 없이 따라다닌 때도,

어떻게 하는 지도 몰랐던 행사를 어떻게든 몸과 정신을 갈아 넣어서 되게 한 때도,

밤 늦게까지 본부와 콜을 한 때도 아니라

더 이상 조직이 나아질 방법이 없다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였다.


나간 세 명의 자리를 채울 인력이 보충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11월에 이르러 듣게 되었다.

그래, 백번 양보하여 조직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세 명 모두 확충이 되지는 않을 수 있겠다 예상했다.

그런데 세 명, 두 명도 아닌 그 중 단 한 명의 인원도 채워지지 않는단다.

아니, 채우기는 커녕 남아있는 우리들도 잘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거다.


나는 그때부터 영혼의 웃음을 잃었다.

지금까지는, 내 법조인으로서의 커리어가 산으로 간다고 느껴질 때에도

그래 큰 차원의 조직을 위해서 내가 조금 더 버티고 제너럴리스트로서 알아야 하는 것들도 배워가는 거다

라고 생각하며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다.

그런데 이게 잠깐이 아니라 영원이란다.


나는 지난 몇 달 간 최선을 다해서 빈 자리를 메꾸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차근히 채워가고

전혀 할 줄 모르는 일, 내가 하게 되리라 생각못했던 일들도

다 나에게 자산이 된다-라고 스스로 설득하면서 지내왔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삶에 끝이 보이기는 커녕 영원히 이렇게 지내야 한다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모든 동력이 멈춰버렸다.


내가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

나는 변호사로서 주된 전문성인 법률 분석이나 검토, 법률 문서 작성, 전략 수립은 할 시간도 없거니와

할 기회도 없고, 기회가 있더라도 그건 내 목소리 내 의견이 아니라 조직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복사 붙여넣기 하고 요약 정리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거기다 각종 행정 처리, 행사 조율, 미팅에서 할 말 대신 써주기, 이메일 대신 써주기, 예산 처리, (내 승진은 개뿔 기회도 없는데) 남의 채용 절차 도와주기 등등 이 조직에 들어오기 전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각종 잡다한 업무가 위의 주된 법무를 능가할 정도로 내 일상을 침범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더 이상 이 곳의 높은 분들이 멋있어 보이지도, 존경스럽지도,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이 조직에 그렇게 오래 몸을 담고 싶지도 않고, 승진을 하거나 해외 발령이 나고 싶지도 않다.

그게 어떤 형태든, 이 안에 있다는 건 부품 1 이라는 거니까.

(아 물론, 어차피 승진이나 해외 발령 기회를 주지도 않는다)


그래도 꿈이 있고, 그래도 민첩하고 빛났던 내 눈빛이 사라지는 게 나 스스로도 느껴져서 그게 가장 통탄스럽다. 내 스스로의 생각과 주장이 사라져 가고, 나는 그저 리서치 툴이나 비서로 전락해버렸다. 글 쓰기를 좋아하고 말하는 걸 좋아하는 나의 강점은 한낮 앵무새로 소모되고만 있다.


나는 소모되고 있다. 내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래서 발전될 기회가 없다.


그래서 나는 숨 막히게 몸부림이 나고 몸서리가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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