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12. 구엘공원
"가장 아름다운 건축은
그 기능에 충실했을 때 비로소 탄생한다."
- Antoni Gaudi -
언뜻 보면 ‘예술가’ 같은 디자이너야말로
다분히 ‘서비스직’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다못해 나에게서 의미를 찾는 화가마저도 대중의 선택에 신경을 쓰는데, 남을 위해 무언갈 만드는 사람이라면 어떻겠는가. 몇 년 전 디자인 회의에서의 일화이다.
"저희가 돈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그냥 심플하게 하려고요."
여기서 의문인 점은 심플과 돈의 상관관계이며, 참으로 주관적인 심플의 강도이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누군가는 한 가지 색채나 톤으로 보이는 것을, 또 누군가는 많은 물건들이 잘 정돈된 상태를 심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때론 그들도 원하는 것을 몰라 심플로 얼버무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도 결과물은 언제나 '좀 멋져내야' 한다. 이런 모호한 요구사항 퍼레이드의 마지막 마무리는 대략 이렇다.
"그래서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내가 벌 수 있는 돈도, 콘셉트도, 데드라인마저도 다방면으로 이타적이어야 했다. 심지어 자본주의적 친절함의 프리셋마저도. 물론 내가 세울 수 있는 기준이라는 건 있겠지만 그 기준마저도 때로는 의뢰인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모든 예측 가능과 불가능의 뒤엉킴 속에서 조율과 타협을 마쳤다면, 그래서 드디어 ‘디자인’이라는 것을 시작했다면, 여기서 디자이너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내가 만들려고 하는 것의 태초의 기능이다
싸고 빠르게 심플하게 잘 만들어도 본래의 기능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실패한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불이 켜지지 않는 조명을 만들면 곤란하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심플이고 나발이고
'무엇'을 만드냐이다
chapter. 12
스페인을 한 바퀴 다 돌고서야 다시 돌아온 이곳 바르셀로나. 2월에 이런 햇살을 맞아본 적이 있던가? 나는 그날 구엘 공원 위쪽에 마련된 구불구불한 벤치에 앉아 온몸으로 만끽한 뜨거운 햇살의 농도를 기억한다.
수천 개의 도자기 타일로 붙여져 딱딱할 법도 한 벤치가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던 그 촉감을, 마음 놓고 어깨와 뒷목을 맡길 수 있었던 등받이 곡선의 편안함을, 사람들과 곁에 앉기도 건너 앉기도 마주 앉기도 할 수 있었던 벤치의 애정 넘치는 라인을.
그 모든 '앉는다'는
행위의 만족스러운 경험을 빠짐없이 기억한다
"가우디는 벤치를 설계하기 앞서 회반죽을 바른 의자 모양의 틀에 옷을 벗은 인부를 앉혀 신체 각 부위에 가해지는 하중과 형태를 측정했다."
앉았을 때 편안해야 한다는 의자의 순수한 기능,
가우디는 그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구웰 공원의 입구는 가장 상층부에서 시작했다. 그 시작인 산책길을 따라가면 방금 앉아 봤던 구웰 공원의 상징인 벤치가 있고 그 밑으로 위엄 있는 86개의 도리스식 기둥 (고대 그리스 건축 양식 중 하나로 주춧돌이 없으며 기둥이 굵고 간결한 것이 특징)들이 떠받치고 있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원근법이다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멀리 있는 것은 작게. 그렇게 보이는 그대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법칙. 내가 가우디의 작품집을 발견했던 6년 전 대학 도서관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86개의 기둥들 밑에는 흰색의 띠가 둘러져 있는데 원래의 원근법대로라면 그 띠가 멀리 갈수록 짧게 보여야 한다. 그러나 가우디는 그것들이 똑같은 길이로 보이게 하기 위해 멀리 있는 기둥의 띠를 조금씩 더 높게 만들었다."
그는 기능에 대한 충실함을 지키면서도
반드시 +심미적 경험을 추가했다
"구엘은 영국의 유서 깊은 정원과 전원주택을 둘러보고 와 바르셀로나 도심지의 외곽에 특별한 주택 단지를 조성하여 분양하기로 한다. 거기엔 입주자들이 쉴 수 있는 공원과 시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우디의 구엘 공원 역시 구엘이라는 의뢰인으로부터 시작 됐다. 문득 그 옛날 가우디의 서비스 정신 역시 보통이 아니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분양 실패라는 쓰디쓴 패배를 맛봐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세계관을 잃지 않으면서 디자이너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다.
편안하면서도 예쁘게,
그러면서도 예산에 맞게,
그러면서도 너무 늦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당연히 근사하게
이런 디자이너의 고민과 행동들이
얼마나 환상적인 고급 서비스인지
다시 한번 여실히 느낀다
참고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 가우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