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바오 10. 바스크 건강관리국 본사
Reference 레퍼런스
: 음악, 영화, 디자인 등 예술적 창작물을 만들 때 영향을 받은 다른 창작물을 가리키며, 오마주나 패러디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
너무 멋지잖아!?
달콤한 예술적 영감은 불행히도 여기서 시작했다. 어떻게 해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사실 거의 대부분) 여러 검색엔진을 전전하면서 누가 누가 더 멋있는 작품을 만들었나 구경하는 일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었던 것 같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이라는 말이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엄청난 행위 : 예술, 그러기엔 너무도 어렸던 스무 살 미대생 꼬마, 지겹도록 반복되는 아이디어의 고갈 속에서 어떤 멋진 '남의 것'을 발견해 '영감'이라는 그럴싸한 꼬리표를 붙여 함정에 빠진 나를 꺼내어 줄 마지막 희망, 지푸라기로 삼곤 했다.
영감이라는 멋들어진 말속엔
나는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은 초조함과
더 대단한 것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투명한 기대감의 바람이 뒤엉켜,
적당히 쓰러지면서도 적당한 내 것을 만들고 싶다는
얄궂은 의지가 붙어 있었다
나에 대한 찬사는 고사하더라도 나의 영감에 대한 박수라도 구걸하기 위해, 그렇게라도 인정받기 위해, 누가 봐도 놀라 자빠질만한 레퍼런스, 그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나는 어리석었던 걸까?
지푸라기를 잡는 대신
스스로 그 구렁텅이에서
기어 나오는 연습을 했어야 했던 걸까?
chapter. 10
건축의 구조물에서 느껴지는 심미성을 통해 내적 즐거움을 얻는 내게 스페인의 북쪽 도시 빌바오는 감히 말하자면 스페인의 모든 도시들 중 가장 재밌는 도시였다.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독특한 건물들이 참 많았다. 보통 역사를 자랑하는 오래된 건물들이나 관광지의 느낌이 대부분이었던 다른 도시들에 비해
이곳의 감각은 좀 더 현대적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도시는 스페인 내에서도 부유한 편에 속하는 도시라고 했다. 어쩔 땐 느낌이 사실보다도 먼저 명확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Bilbao, 그곳은
현대 건축의 흥미로운 요소들이
오므라이스 위 뿌려진 케첩만큼이나
화려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빌바오에 온 이유, 유일한 목적지, 구겐하임 미술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던 때였다. 저 멀리 익숙한 건물이 내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마치 전 남자 친구를 아주 먼 곳에서부터 알아보고 고개를 갸웃할 정도의 몽롱한 시간적 알아차림이었다.
이 극적 만남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됐다
대학교 3학년, 섬유 디자인 수업을 듣고 있던 나는 어딜 봐도 꽃 천지인 패턴 디자인의 정석에서 어떠한 재미도 느끼지 못했다. 꽃이 싫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저 꽃무늬 원단을 디자인하는 것이 내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뿐이다.
그때 나는 Architecture in my sight라는 주제로 남들과 조금 다른 작업물을 만드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
건축 디자인에서 느껴지는 구조적인 반복을
원단의 패턴 디자인에 적용시켜보고 싶었다
물론 선호하는 인간들이 많지 않음을 안다. 생각보다 꽃무늬는 전지구적으로도 호불호가 적은, 뛰어난 상품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첫 번째
레퍼런스 사진이었다
뭘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저 건물이
영감의 고장 핀터레스트에는 디자이너들을 흥분시킬 사진들로 가득했다. 거기서 적당한 사진을 골라 레퍼런스라는 명목으로 과제를 하곤 했다. 내가 저 건물을 골랐던 이유는 첫 번째 독특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각진 표면들이 패턴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요소로서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무의식에 가까운 사진 골라내기 식의, 적당히 위대해 보이는 이미지 선출 과정은 인간의 무능력함(스스로가 창조할 수 없음)과 나약함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보고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내가 20대 중반, 레퍼런스를 약이라 생각해야 할지 독이라 생각해야 할지 헷갈리는 부분이었다. 내 것을 만들기 위해 대단한 것을 찾는 일, 그것은 정녕 허상에 불과한 행동일까.
"예술은 도둑질이다."
-Pablo Picasso-
우연히 재회한 나의 엑스 영감이 그저 '건강관리국'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공적인 일이 치러지는 공간이 생각보다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로 솟구쳐 있는 불규칙한 겉면들은 그 근방에 있는 건물들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햇볕의 조도에 따라서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기도 했다.
저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문득 건축물의 외면과 내면이 모두 인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루에 대부분의 시간을 어떠한 건물, 어떠한 공간에서 머무는 인간들에게 말이다.
네모 반듯하고 꽉 막힌 공간에서 일하는 공무원과,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공간에서 일하는 공무원은 삶을 대하는 자세마저도 다를 것만 같았다.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는
나의 엑스를 이렇게 실제로 보니,
내가 꽤 괜찮은 친구를 마음에 뒀었구나
괜스레 으쓱하게 됐다
나를 찾는 일이 선행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에도
나는 이 영감의 허상 속에서 아마 자발적으로,
아마 영원히, 허우적대고 있을 것 같다.
완벽은 없기에, 더 훌륭한 것을 찾고, 직접 두 눈으로 찾아보고, 스스로 창조할 수 없음에 수 백번 고꾸라져 보고, 대단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차이를 고심하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아름다운 그 과정의 중심에 서고 싶기 때문이다.
다만, 진정 나만의 것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훌륭함의 유혹에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일 테다. 이미 만들어진 위대한 것을 '나'라는 여과 장치에 투과하는 과정에서 설령 무력하게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또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일 테다.
나는 앞으로도 창조하는 일에 기꺼이
지푸라기라도 잡아 쥐어뜯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