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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즈 Dec 21. 2022

움직이면 찍을게요, 돌하르방

고요 속의 움직임은 소리가 크다



커피를 챙겨 말끔히 정리된 식탁 테이블에 앉았다. 베란다 창 너머 햇살이 버티컬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고, 집 안 공기는 고요해 현관 밖 엘리베이터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겨울을 맞아 샀던 작은 패턴과 은은한 색감의 쿠션이 소파에 살짝 흐트러진 모습으로 안정감을 준다. 테이블 아래로 맨다리를 쭉 뻗어 스트레칭을 하고 의자를 좀 당겨 앉았다.


달그릇 공방에서 먹기로 한 점심 식사는 취소되었다. 아까 지인이 전화를 걸어, 함께 식사하기로 한 또 다른 지인이 오전에 다른 볼 일이 생겨 못 오게 됐단다. 갑자기 취소한 데에 기분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기분 상하지 않았다.


로 식사를 챙겨서 기쁘기 그지 없는 마음으로 과일과 비스킷과 모닝빵을 먹었다. 아이는 학교에 갔으니 오후나 되어야 올 것이다. 4시간 가량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내면에서 달콤하게 압축된 기쁨을 느꼈다.    




‘서점에 가야겠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외출 준비를 마저 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익숙한 도로를 지나, 자주 가는 서점에서 책을 구입했다. 옛날에 제목을 들어보고 기억해 뒀던 종류의 책이었다. 그 책의 저자가 미디어에 노출된 인터뷰 기사에서 어떻게 글을 쓰냐는 질문에 언제라도 바로 쓸 수 있는 준비를 늘 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다른 책도 한 권 샀는데 표지에 ‘계속 쓰는 삶을 위해’ 라는 제목 일부가 보여서였다. 계산대의 여자 점원에게 차량 번호를 말해 주차 확인을 한 후, 잎이 다 떨어진 나무를 지나 찬 공기를 맞으며 다시 차에 올라탔다. 마스크를 벗어두고 지코의 ‘아무 노래’를 크게 틀어 둠칫거리는 음악을 따라 콧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드라이브 스루로 커피를 사서 잠깐 차를 세워두고 책을 읽었다.        




시나리오에서 동적이지 않은 인물은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냐는 질문에 답하는 유명 감독의 말을 인용하고 있었다.


 “음... 제주도에 돌하르방이 있잖아요. 평생을 한 자리에서 이르케, 이런 자세로 살아온 돌하르방이 있는데... 그 돌하르방이, 그 긴 인생에서, 그래도 한 번쯤은 도발하고 싶은 순간이 있을 거거든요? 그 순간을 화면에 담는다면 동적이지 않은 인물도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겠죠?”



이미지 출처 tiju.tistory.com



따뜻하고 진한 커피를 마저 마시며 눈을 감았고 생각은 자연스럽게 직장 다니던 시절로 흘러갔다.




직장에서 연말 파티로 무대 연극 행사를 준비했다. 무대에 오르기 위해 팀원들과 짠 시나리오로 각자 배역을 맡아, 역할에 맞는 이미지로 보이도록 연기 연습도 했다.




행사는 평소 업무와는 별개의 깜짝쇼지만 이 무대에 임하는 나의 자세가 다른 직장 동료들에게 인상 깊이 남을 것이라는 점을 알기에,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표현하는 끼가 없어서 어색했던 연기에 누군가는 쌀쌀맞은 평가를 했을지 몰라도 난 신경쓰지 않았다.


함께 준비하는 팀원과의 분위기를 위해 노력했고 무대가 끝난 뒤 쏟아지는 함성에 박수 받을 권리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관중들이 보는 무대에 들어서면서 입장할 때건, 다른 동료 연기자와 대사를 주고받을 때건, 연기를 위해 의자에 앉을 때건, 내 대사가 없더라도 다른 연기자가 말을 할 때건, 연기자처럼 적절하게 움직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무대 위 서 조명을 받고 관중의 주목을 받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됐다.



무대에서 내가 맡은

인물의 캐릭터는 동적이지 않으나,

무대 경험 그 자체는, 

동적이지 않은 내 인생에서, 

내가 한 번쯤 도발했던 순간이었다.


지금 회상하니 그 때의 내가

책 속 유명 감독이 말한 그 순간에 있었다고 느껴지면서, 

그 말이 선명하게 와 닿는다.        



그러나

그 순간이 나인가.



도발해야만 주인공으로 담아내는가.



읽던 책을 덮고 다시 운전했다. 자동차 앞 유리로, 하얀 먼지 같은 것이 폴폴 날린다. 차 밖으로 자신이 직접 짠 강아지 옷을 입힌 채, 개와 함께 길을 건너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신호등 불빛이 빨간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뀐다.


화려하게 주목 받는 입체감 넘치는 배우가 아니라도, 내 긴 인생에서 동적 순간들은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있을 .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와 차가운 공기가 오가는 사람들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당신은 그 자체로 충분해요. 충분해요. 충분해요. 나는 생각했다. 그래. 힘차게 움직이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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