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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즈 Jan 01. 2023

인생의 한 칸은 남아서, STAY

외계인이 펼쳐놓고 보고 있다는 상상



아빠가 집을 떠난 그 시간이 딸아이에게는 몹시 혹독했다. 집 앞의 큰 들판은 생기를 잃어 곡식들은 납작하게 드러누워 있었고, 위로는 더러운 먼지가 싯누렇게 부글거렸다. 마을 전체가 지저분한 거즈로 덮인 듯, 하늘은 밝은 햇빛이라면 스며들지 못하게 아예 몰아내버려 마을에는 희미하고 나른한 느낌만 감돌았다. 곧 종말이 올 것 같은 먼지가 무자비하게 덮쳤다.


집에 있는 사람들은 메슥거리는 공기 냄새에 집 창문을 끝까지 올려 닫으며, 연신 마른기침을 내뱉었고 이런 고약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익숙해진다. 부엌 선반을 쓸면 소복하게 쌓인 먼지가 당연한 듯, 이렇게 지독한 먼지 속에도 그 사실이 딱히 거슬리지 않은 모양으로 버틴다.

  

이렇게 나른한 장면 속에 딸아이가 있다.

숱이 적당한 진갈색 머리를 대충 틀어 올려서 자연스럽게 머리칼이 얼굴에 흘러내리는 모습의 평범한 여자 아이의 인상인데 짙은 색의 작은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아빠가 떠난 뒤 한참을 울다가 현실을 받아들이고는 담담히 앉아 이 방 안에서 단단한 시간을 보냈으리라.


딸아이의 방은 엔틱한 가구로 채워져있다.

문을 열면 바로 마주하는 벽면에 큰 책장이 있어 책들이 칸칸마다 가득 보이고, 오른쪽 벽면 쪽으로는 침대가 책장과 수직으로 거의 맞닿게 놓여있다. 왼쪽 벽면에는 격자틀의 창문이 있어 이따금 햇살이 러그가 깔린 바닥 위 허공으로 내려앉는 집안 먼지를 비추곤 했다.


초록색이라고는 없었다. 사물은 죄다 어두운 색으로 시들어 있었다. 창문이 열려 바깥공기가 바람을 토하면 바닥의 죽은 먼지들이 되살아났다. 이 공간에서 4차원의 시공간에 있는 아빠가 딸아이의 책장 너머로 소통하는 순간이 나온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이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4차원의 공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땅 위라는 평면 공간만 다니는 인간이 잘 상상하지 못하는 위아래 상황인가. 위아래로도 세상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사는 새의 관점으로 보면 달라지는 차원일까.


4차원의 시공간을 보는 외계인이 우리의 과거와 미래, 현재까지 동시에 쭉 펼쳐놓고 보는 관점을 상상해 본다. 멀리 해외의 호숫가를 누군가와 산책하다가 입국하여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 호숫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듯 4차원의 시공간으로 바라보면 지나가버린 과거도 증발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항상 호숫가처럼 자리하고 있다는 논리를 펴본다.


이렇게 생각하면 죽음을 맞이해 떠난 사람도 그냥 사라져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 4차원 시공간의 한편에 그 사람이 살아낸 인생만큼의 영역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고 외계인은 여전히 그 사람이 있는 풍경을 본다는 거다.  

   


시공간의 초월을 생각하고 나면 내가 사는 순간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내가 살아내는 인생만큼의 영역이 한 칸 한 칸으로 계속 남겨지는 상상을 다시 해 본다. STAY. 내가 원하는 한 칸으로 채워지고 있는가. 인생 전체를 볼 때, 가늘고 긴 두려움에 잔뜩 쫄아서 겉으로만 빙빙 도는 한 칸은 아닌가. 사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그 두려움의 반대편에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네에서 마침내 뛰어내리는 데 성공할 아이처럼, 작은 두근거림을 안고 멈추지 않는 스윙을 즐기다가 뛰어야 할 때가 오면 미련없이 점프 하고싶다. 착지할 포즈가 아름답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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