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즈 Jun 23. 2024

정신과의사 앞에 가면 다 말할 수 있겠니


누가 감히

내 십여년의 육아를

논하는가.



학기초

상담 전화만큼 곱씹어보게 되는 일이 있을까. 담임 선생님의 한마디는 길고 긴 내 육아에 대한 절묘한 결정적 피드백이기 때문이다.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라, 그 첫인상이 곧 나와 내 가족의 이미지를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해서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어차피 일년 내도록 안 볼 사이지만, 아이로 인해 우리 가족의 많은 부분을 추측하는 사람. 담임선생님. 학기초 상담전화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내 부모로서의 이미지를 마련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 때 나는 내 가식의 끝을 본다.





뭐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아..네. 선생님, 제가 가정에서
아이 글쓰기를 주1회 정도 지도한다면,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을까요?




선생님께 아이의 교우 관계에 대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더 들은 후 선생님이 더 물어볼 이 없냐고 말씀하셨다. "글쓰기를 하신다고 들었다."며 선생님의 학습 활동에 대해 칭찬을 했다. 그리고 내가 가정에서 글쓰기를 교육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하면 좋을지 조언해 달라고 했다.   참, 물어놓고 안하는 이 뻔뻔스러움을 선생님은 혹시 눈치채셨을까.


선생님은 자신이 아이들에게 본 것들은 간단하게 세네줄 정도로 글을 쓰라고 시킨다고 말씀하셨다. 대화를 오고 가면서 동시에 떠올렸다. 이렇게 글쓰기에 관련한 내용을 물어보는 나같은 엄마를 아주 교육적인 엄마라고 생각하시겠지.


학기초, 아이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전화에서 교육에 관심있는 엄마처럼 비춰지길 은근히 때론 노골적으로 어필하는 내모습을 본다.



왜 이렇게 가면을 쓸까.


'치버의 일기'를 보면, 그는 정신과 의사 앞에서조차 자신의 진짜 불안의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정신과 의사를 찾았다. 거세와 동성애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우리 대화는 신중한 분위기가 흘렀다. 내가 동성애적인 본능을 갖고 있고 그것이 고통스러운 불안감의 주원인이라고 의사에게 명확히 진술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많은 얘기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의사가 임의적으로 고백할 기회를 주겠다고 제한했기 때문이다. 난 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고대 지만 의사의 태도나 분위기 때문에 내가 혹시 동성애자가 아닐까 싶어 가끔 두려워진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바로 이런 고집이 내 어려움에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이 원래 분열적이고 모순적이고 반항적이고 삐딱하다는 점을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그것은 개인에게 적용될 때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듯하다. 단순해지고 자연스러워지고 또 공감하는 생명체가 되는 것이 내 희망이지만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존치버의 일기'에서 발췌>



존치버의 일기 중, 자신이 생각하는 불안의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그건 덮어두고 다른 얘기를 했다는 치버.



정말 그게 가능할까.

정신과 의사에게 가면 내 마음을 정말 투명하게, 다 터놓고 말할 수 있게 될까. 정신과 의사 앞에서도, 이 의사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내가 이렇게 말하면 '심리학 책은 좀 읽어봤구나', '부모로서의 책임감은 있구나.', '불안의 원인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걸' 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 의사의 생각에 대해서도, 신경쓰며 말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의사는 나보다 한 수 위겠지만.)




타인과의 대화를 곱씹는 과정



1. 내 말에 대한 검열
2. 내 말을 들었을 그녀에 대한 검열
3. 그녀의 말에 대한 검열
4. 그녀의 의도에 대한 검열

나는 _____라 말했고,
그녀는 _____ 라 말했다.





진짜 정말 진심으로, 내 속마음을 없이, 가장없이, 타인에게 터 놓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본다. 가능한 곳은 하나. 써버리고 폐기 가능한 일기장 밖에  않을까. 리얼하게 쓰고 근사하게 고칠 수 있으므로. 그 어떤 타인 앞에서도 얇은 가면까지는 벗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 아닐까. 결국 글쓰기가 가장 좋은 치료제다.

 

민낯을 드러내는 글쓰기는 내 노트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위 사진의 노트는 치버의 일기 중 '고통스런 불안의 원인을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치버의 원문을 필사한 내용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국어를 잘하면 뭐가 좋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