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 얻은 기회를 돌아보다
어릴 때 오락실에 가면, 최종 보스를 깨는 게임이 있었다.
최종 보스를 깬 친구들은 게임에 특출 난 재능이 있거나, 가져온 동전이 많았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임 실력이 뛰어나지 않고 동전마저 적은 친구들은, 다른 친구가 최종 보스를 깨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동전이 없는 아이는 한두 번 실수하면 재도전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비단 오락실 게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부모가 재정적으로 충분히 지원해 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수능에서 한 번 미끄러져도 유명한 재수학원에 등록해 한두 해 더 공부할 수 있다. 만약 한국에서 원하는 대학에 실패하면 해외 유학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취업이 안 되면 대학원을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받거나, 직업을 바꾸고 싶으면 새로운 공부에 도전할 기회가 생긴다. 회사 생활이 힘들 때는 잠시 쉬거나 여행할 재정적 여유가 생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즉, 부모로부터 지속적인 동전(재정 지원)을 받는 아이들은 실패해도 언제든 한 번 더 게임을 이어갈 수 있다.
반면, 부모의 경제력이 부족하거나 부모를 오히려 부양해야 하는 아이들은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수능에서 실수해도 재수를 선택하기 어렵고, 좋은 사립대에 합격해도 높은 학비 탓에 장학금이 나오는 국공립대에 가야 할 가능성이 크다. 생활비 또한 직접 벌어야 하므로 잠시 쉬고 싶어도 마음대로 시간을 내기 힘들다. 나는 부모님에게서 수많은 기회를 받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경제적 지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완전히 안다고 말하기는 조심스럽다.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어려운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들어볼 수 있었을 뿐이다.
나는 이제 곧 회사를 그만두고 MBA 진학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MBA에서 합격 이메일을 받았을 때, 미국 유학 경험과 스타트업에서의 리더 경험, 그리고 내가 가진 꿈과 열정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금 우쭐해졌다. 게다가 부모님이 학비를 지원해 주신다고 하고, 남편과 시댁에서도 내 공부를 응원해 주니, 또 한 번 큰 기회를 얻었다는 기분에 자만심이 스멀스멀 올라온 것 같다. 그 순간, 무의식 속에 있던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 떠올랐다.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한다는 게,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공정하다는 착각이 처음 나왔을 때,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운 좋게 누려온 삶에 대해 처음으로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태도를 지닌 것도, 평균보다 높은 아이큐를 가진 것도, 여러 번 재도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것도 결국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과거에 원하던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을 때, 월 200만 원이 드는 기숙형 재수학원에서 10개월간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한국 대학을 자퇴하고 미국 유학으로 전환해 내가 좋아하는 심리학을 공부할 기회도 잡았다. 엄마의 인맥을 통해 심리센터 인턴십을 하면서 임상심리사라는 길이 나와 맞는지 확인해 볼 수도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취업을 준비할 때도 1년간 별도의 생계 걱정 없이 오롯이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부모님이 여러 번 ‘동전’을 주셨기에, 나는 실패해도 계속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렇게 반복적으로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뭘까'를 탐색해 볼 여유도 생겼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향 자체도 한몫했겠지만, 새롭게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이런 특권을 가졌다는 점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고, 아직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과 기회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동전을 나눠주자는 이상론을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동전이 없어서 다음 판에 도전조차 못 하는 친구가 있다면, 내가 가진 동전 하나를 건네주어 함께 최종 보스를 깨고 함께 기뻐하고 싶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