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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소 그리고 은인

가끔은 나도 생각한다, 불공평한 이 더러운 세상

by livethedreamlifegoeson

난 오른쪽 난소에 기형종이 있다. 막둥이 임신 때 발견 아이 낳고 일 년 후 검진에 진단. 크기가 더 커지지는 않아서 두고 보다가 모유수유를 오래 한 덕에 크기가 그대로여서 올해 초에 검진 때도 수술 보류. 지금 모유수유 끊고 거의 일 년 다 되어 가는데 요즘 오른쪽 골반 주위가 콕콕 항상 뭔가 있는 거 같은 불편감. 쥐피를 약속 잡고 초음파를 한번 해달라고 해야겠지. 연말이라 바빠서 약속이 빨리 잡힐지는 모르겠다. 기형종은 수술로 없애고 그 후에 보통 생검을 하는데 대부분 양성이란다. 그냥 머리카락 이빨 같은 것들이 난소에 자라는 거라고. 근데 드물게 그게 악성으로 변하기도 한단다.


내가 처음 진단받고 우리 이곳에 와서 우리를 정말 많이 도와주시던 대만에서 이민오신 동료 간호사 아주머니. 나도 똑같은 거 이십 년째 추적 관찰 중이야. 이 나라에서 아무것도 안 해줘 괜찮다고 그냥 두래서 매년 사이즈만 재. 그러셨다. 그리고 검진을 가셨는데 크기가 커져서 제거를 하는 수술을 받으셨고 악성으로 판명 나서 다시 자궁과 난소 나팔관 모두를 제거하는 수술을 다시 받으셨다. 그리고 다시 일을 복귀하셨는데 일하면서도 씩씩하시지만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가지 않게 최선을 다해 일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재테크를 잘해놓아서 돈은 이미 차고 넘치고 자녀들도 모두 잘 키워놓아 의사 약사 약학박사. 돈 때문에 나와서 일하는 건 전혀 아니었다.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도와주고 헌신하던 그분에게 간호사 일은 그분의 삶의 자체였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환자들을 진심으로 대했다. 환자들도 그걸 다 느꼈다. 환자뿐만 아니라 같은 동료들도 우리를 포함해 누구 하나 그분에게 신세를 안 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다시 태어난 거라며 더 열심히 사시려 노력했고 얼마 전 태어나 아장아장 걷는 손주 사진을 동료들에게 보여주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그리고 딸들과 함께 이번 휴가에는 유럽여행을 다니기로 했다며 설레어하셨다.


휴가 가기 직전에 아주머니는 CT 사진을 찍었다. 그 사이 일주일 시간이 있었지만 의사가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다며 홀가분하게 다녀오겠다며 가셨는데 독일에 도착해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의사에게 암이 다른 곳으로 전이된 것 같다는 연락을 받으셨고 설레던 여행의 일정을 모두 접고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와 치료를 다시 받기 시작하셨다. 남들은 그렇게 도와주셨으면서 본인이 아플 때는 그 어떤 누구도 만나지 않고 싶어 하셨다. 본인의 힘든 모습을 보여주기 싫으셨을 테지만 남들이 본인 때문에 걱정하며 에너지 쓰는 것조차도 미안해하셨다. 항암은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더니 다시 암의 기세가 등등해지고 상태가 안 좋아 응급실에 몇 번 들락날락하셨다는 소식을 간간이 들었다.


우리 시어머니가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아픈 와중에 항암으로 다 빠져버린 머리를 감추느라 두건을 쓰고는 살이 빠져 가녀린 몸으로 우리 집에 몰래 오셔서 선물만 놔두고 가시는걸 우리 집 CCTV를 다행히 설치해 놔서 알람이 울려 얼른 나가서 잡아 감사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걱정할까 봐 얼른 다시 가시려는데 우리 시어머니 말도 안 통하지만 사연을 아시기에 감사하다며 아주머니를 안아드렸다. 순간 너무 눈물이 났지만 꾹 참고 웃으며 아주머니와 같이 온 아주머니 남편을 배웅했다. 그 어떤 감사 인사도 부족한 내 마음속 가득한 고마움과 슬픔을 어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이국땅에 와서 만난 또 다른 국적의 이민자. 같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동질감을 느끼며 잘해주고 응원해 주고 같은 한국인들은 등 돌려도 그분은 항상 주시기만 했고 감사히 받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시는 그런 분이었다. 우리 엄마가 잠깐 놀러 왔을 때 집으로 초대해서 직접 만든 만두에 케이크에 바리바리 내어주며 배가 터지도록 우리를 대접해 주시던 분. 우리 엄마는 걱정하던 우리에게 저런 분도 있다는 게 너무 위안이 된다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주머니의 암이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며 직장에 복귀해도 된다는 의사의 말이 있었다며 아주머니는 먹을 것들을 잔뜩 사가지고 병원에 가져다 놓고 아이처럼 좋아하며 다시 일하러 나와서는 일단은 나와서 무리하지 말고 간단한 일만 해달라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여기저기 다니며 일을 찾아 하기 시작했고 걱정은 되지만 저렇게 좋아하니 그래도 잘 된 거 아니냐며 다들 흐뭇해했었다.


그렇게 일주일. 이후로 아주머니는 다시 일을 나오지 못하셨다. 나중에 들으니 아주머니 상태가 안 좋아지셔서 응급실에 가셨고 암이 더 진행되어 이젠 정말 호스피스케어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번엔 안 좋아지는 속도가 빨랐다. 응급실에 아주머니가 왔었다는 소식이 자주 들렸다. 메시지를 하도 사람들이 보내니 매니저에게 퍼트려달라며 당분간 메시지를 자제해 달라고 남편분이 부탁해 왔다. 사람들의 메시지 하나하나 볼 때마다 우신다고 했다. 그래서 연락해 볼 수도 없었고 애만 태우고 있었다. 같이 사진과 추억들 편지로 써서 한꺼번에 보내자는 의견이 나왔고 우리도 그렇게 우리의 추억의 비디오를 보내 아주머니가 꼭 보시길 바라면서 보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주머니가 어느 동료에게 자신의 버켓 리스트를 대신 이루어 달라며 예전부터 같이 일하던 동료들 자녀에게 선물을 보내왔다. 물론 우리 딸 것과 막둥이 선물도 있었다. 막둥이를 아주머니가 주신 빨간 큰 소방차 앞에서 사진을 찍게 해서 보내드리려고 보관하고 있었다. 밤이 늦어서 그다음 날에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날 밤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가셨던 것. 게다가 아주머니는 유언으로 아무런 장례식도 생략해 달라고 부탁하셨다고 한다. 가족들끼리 간단히 의식을 치르고 그다음 날 바로 화장을 했다고… 남편과 나는 그럼 진짜 이렇게 끝이네.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그냥 끝이네… 그래 아주머니답다… 진짜 끝까지 남만 생각하시는 아주머니다워.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병원에서 일하는데 아주머니 메모리얼 겸 간단한 먹을 거를 셰어 한다고 해서 의아했다. 무슨 일이지 매니저가 그런 것도 준비하다니 마음이 깊네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게 생전에 아주머님이 미리 준비한 유언이라고 한다. 그래서 딸이 아주머니 유언을 받들어 준비한 것. 병원 사람들 다 모여서 한 마디씩 하라는데 난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너무 나서 그렇게 천사 같은 사람이 너무 허망하게 빨리 간 것이 너무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고 해도 너무 슬퍼서 다른 방에 가서 꺼이꺼이 울었다. 세상은 불공평한 거 투성이인걸 알지만 그날은 더 그 사실이 참을 수가 없이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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