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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있는그대로 Oct 23. 2023

시월에 너를 보낸다

미움

오랜 세월 희생자로 살았다. 나는 잘하는데 손해만 보는 것 같았다. 잘하려고 할수록 내 시간 내 의견 내 감정은 없어졌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희생자였다. 점점 무기력해졌다. 악한 사람들 틈에서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 시절이었다.


먼저 입사한 영자는 순하고 착하다고 부장님이 소개해 줬다. 그는 절대 자기 의견을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냥 네, 네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줄 알았다. 그 모든 건 내숭이었고 양의 탈을 쓴

여우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내가 하지 않은 말 일들이 내가 한 것으로 되어 돌아왔다. 혼란스러웠다. 그가 날 잘 몰라서 그런가 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심해졌다. 말을 하면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맑은 눈빛에 순한 얼굴에 나를 의심했다. 여자들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이나마 알아갔는데 남자들은 전혀 몰랐다. 특히 부장님은 영자에 대해 절대적이었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 많은 시간이 흘러 그가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도 많은 상처 준 것을 알았다. 참 치사한 것이 큰일이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 문제가 되어 말하기도 뭣한 것들이라 나중에야 진실을 알게 되었다.


가령 그가 커피당번이다. 부장님 커피는 제시간에 책상 위에 놓여졌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회사에 늦었다. 그러면 늦으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면 될 테인데 부장님께 전화해서 자기가 늦어서 00에게 부탁을 하려 했는데 그도 늦은 거 같아 죄송하다. 하고는 출근 후 자기가 부장님 커피를 갖다 주는 식이다.  그런데 00에게 전화를 한 적도 없고 00가 늦지도 않은 것이다. 부장님은 00을 지각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 시절에는 출근시간보다 30분 일찍 나가는 것이 예의였다.


각자 개인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는 전화메모도 중요했다. 그런데 부장님의 개인전화를 받고 영자가 잊었다. 다음날 불같이 화가 나서 누가 전화를 받았느냐고 소리 지른다. 네가 받았냐 네가 받았냐 추궁을 한다. 모두 아니라고 한다. 영자도 아니라고 한다. 하루 종일 사무실 분위기가 싸해진다. 답답한 마음에 점심 먹으며 누가 전화를 받았는지 궁금하여 서로 이리저리 질문들을 해 본다. 치밀하지 못해서 나중에 이렇게 저렇게 찔러보면 영자가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 밝혀진다. 너 가 받았네, 하면. 자기가 조금 전에 말해 놓고도 아차 싶은지 어 그건 옛날 일 인거 같아 이렇게 말꼬리를 흐리며 부장님 커피 드려야겠다. 이러며 부장실로 가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도토리 키 재기로 영자가 조금 느리고 능력이 떨어진 듯 인식되어 있었다. 본인도 느끼고 있어서 인지 부장님에게 없는 말하고 누가 자기보다 강하다 잘났다 싶으면 부장님에게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하고. 부장님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좋게 보면 미묘하게 이간질을 시켰다. 부장님은 그가 착하다 순하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옆에서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알아듣지 못했다. 참 속 터지고 답답하고 억울했다. 일은 내가 더 많이 하고 더 잘하는데 칭찬은 그가 듣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비슷하게 항상 나는 손해만 본다. 억울하다. 희생자다 하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러다 보니 웃음 뒤에 어둠이 깔려 있고 자신감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모두가 내가 반응을 잘못해서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한두 번 반복되었을 때 하지 말라고 말했어야 했다. 용기 내어 부장님에게 영자가 전화한 적 없고 내가 지각한 적도 없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냥 착한 척 괜찮은 척한 것이 실수였다. 그게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 당시에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그의 행동이 악하다 생각했다. 아무나 붙들고 하소연하고 싶었고, 억울해서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회사생활이 힘든 건 모두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들이 그리 큰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내가 용기가 없어서 나를 지키지 못한 것이 이유임을 알아간다. 현명하지 못했음을 알아간다. 이번 기회에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그가 악하다는 생각을 놓아준다.

영자야 너를 많이 미워했어. 이제 그 미움 놓아줄게, 잘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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