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램지3. <모번켈러의 여행 (Morvern Callar)>(2002)
<모번 켈러의 여행>은 주인공 모번 켈러의 얼굴이 화면 가득 잡히며 시작된다. 그의 얼굴에는 빨간 조명이 치직-치직하는 소리와 함께 리듬을 형성하고 깜빡거리며 드리워진다. 피 묻은 피부, 쓰러져 있는 남자친구 등이 잡히며 마치 경찰 사이렌 조명이 드리우는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한다. 이후, 이 조명은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알전구라는 것이 보여지지만, 실제의 의미(크리스마스 트리 조명)보다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죽음과 함께 시작 된 영화 <모번 켈러의 여행>에서 죽음은 영화 중반 이후 그 자취를 감추는 것 같이 보인다. 인터넷에 해당 영화를 검색하면 ‘로드 무비’로 분류되어 있을 만큼, 남자친구의 죽음은 사소한 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모번 켈러는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20대 여성으로, 자신의 집에서 자살한 남자친구의 시체와 그의 크리스마스 선물, 유서, 그리고 그가 쓴 소설을 손에 넣게 된다. 영화의 끝까지 남자친구의 자살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켈러 역시 자신의 집에서 시체가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에 의문을 갖거나 이유를 궁금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가 남긴 테이프 속 노래를 듣고, 그가 준 라이터로 담배를 피울 뿐이다. 이후 켈러는 ‘내 소설을 인쇄해서 출판사에 보내줘’ 라는 남자친구의 유언을 보곤, 소설의 저자명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어 출판사에 투고한다. 그가 준 카세트 플레이어로 노래를 들으며 그의 시체를 토막내 처리하기도 한다. 그가 남긴 돈으로는 친구와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는 등,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한다. 다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남자친구가 남긴 유언장 속 ‘I Love You, Be Brave.’라는 문구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켈러의 시선에서, 켈러가 무언가에 의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압박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느낌 정도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남자친구의 죽음 자체가 이후 러닝타임을 채우는 켈러의 행동의 ‘명확한 행동 동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죽지 않은 남자친구가 남긴 편지에 ‘Be Brave’가 적혀있었고, 켈러의 수중에 돈이 있었다면, 애인의 죽음과 무관하게 켈러는 동일한 행동들을 (시체를 토막낸다거나, 그의 소설을 가로챈다거나 하는 행위는 할 수 없었겠지만) 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물론 스페인의 한 호텔에서 만난 남자친구의 환영 같은 이가 “떠나, 다시 떠나야해.”라고 말하는 모습으로, 켈러의 여정이 애인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한 번 더 보여지지만, 이 역시 죽음 자체가 직접적인 동기라고 보여지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그저 삶과 뒤엉킨, 특별하지만 작은 요소정도로 그려진다. 특히 활기찬 음악이 깔린 채, 켈러가 선글라스와 속옷만 입고 남자친구의 시체를 토막내는 장면은 일상 속 작은 이벤트의 느낌으로 보여진다. 음악이 줄어들고 켈러의 숨소리가 작게 들리는 지점에서야, 죽음의 실제적인 의미가 아주 살짝 느껴질 정도다. 영화 중반부를 지나 스페인에서 출판사 직원들과 함께 이름모를 누군가의 납골당을 어루만지는 켈러의 모습 이후, 죽음은 영화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가 죽으며 남긴 소설 역시 무슨 내용인지,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길래 출판사 직원들이 큰 돈을 주려 하는 건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켈러가 그 소설을 팔고 받은 수표로 그 가치가 보여질 뿐이다.
여행. 켈러는 계속 살던 곳에서부터 멀어지려 한다. 스코틀랜드에서 스페인으로, 자신을 아는 이가 많고 익숙한 고향에서 타지로. 켈러의 친구는 “꿈 깨라”며 어딜 가든 다 똑같다 말하지만, 켈러는 결국 떠난다.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했던 기차역 플랫폼에 켈러는 다시 도착한다. 그곳에서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는 아침이 올 때 까지 앉아, 자신을 데려 갈 기차를 기다린다. 켈러는 계속 움직이고 싶은 인물이었다. “나는 여기가 좋아. 왜 떠나야 해?”라고 묻는 친구의 대사와 켈러의 행동들은 너무도 대조된다. 파티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외로움을 느꼈을 때, 어두컴컴한 황무지에서 밤을 지새울 때, 슈퍼마켓 당근에 붙어있는 죽은 지렁이를 봤을 때도, 켈러는 계속 움직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Be Brave’해 실행에 옮긴 인물인 것이다. 달리는 차에 타고 있는 켈러의 모습, 살아 움직이는 지렁이를 볼 때의 모습은 고향에서 살아가던 때의 켈러의 모습과 달리 진짜 살아있는 듯 느껴진다. 이 영화가 로드무비로 분류 된 이유는 분명 이런 모습을 때문일 것이다. <모번 켈러의 여행>에서 애인의 죽음보다 중요한 것은, 여정을 통해 보여지는 켈러의 욕망과 변화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