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 은 '살아 있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살면서 참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데는 돈이 듭니다.
효용의 관점에서 사람을 봤을 때 사람은 살아 있는 것만으로 일정 재화를 소모합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요. 따라서 우리 인생에는 고정 지출 비용이 있는 셈이며, 최소한 '밥값' 에 해당하는 가치(돈)를 창출해야만 간신히 효용의 대차대조표는 0에 맞춰집니다.
위 평균 수명에 따른 밥값 산출 공식에 따르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4억 4천만원까지는 열심히 벌어도 제로 가성비입니다. 취직해서 16년 정도까지는 벌어도 삶은 가성비가 나쁩니다. 최소한 성인이 된 이후에 임금을 받고 일한다고 하면, 최소한 30대 중반까지는 삶이 별로이다가 그 이후부터 나아질락말락 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아니, 삶을 어떻게 가성비 좋은 구간, 가성비 떨어지는 삶 같은 것으로 나누느냐? 삶을 비용과 효용으로만 계산해도 되느냐?' 라고 생각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네, 이 편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삶이 가성비로 따져져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주제를 만나면 너무나 쉽게 돌아서서 비용을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경제적) 효용이며 효율을 지나치게 중시한 사회의 버릇 탓이지요.
이전 편, 가연 씨의 글을 읽고 '인간적인 방' 이란 무엇인가, 그 조건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청년 주택 디자인 공모전에서 개인 방 크기는 12㎡면 충분한데, 18㎡로 공간을 조금 더 둔 디자인이 '지나치게 넓다' 며 지적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전자는 원룸 중에서도 좁고, 후자는 그보다 조금 더 넓습니다. 6제곱미터 차이는 청년의 생존에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이며, 같은 대지 면적에서는 방을 몇 개 덜 만들게 될 것이며, 비용 대비 청년의 수용 효율은 좀 떨어지겠고, 정책적으로 보고서에 올라가는 숫자는 좀 작어질 것입니다.
6제곱미터 차이는 방 안에 책상, 침대, 가전을 들여놓았을 때 조금은 덜 답답한 기분이 들게 하는 차이일 테고, 수납장을 하나 더 넣느냐 안 넣느냐 하는 차이일 수도 있고, 빨래 건조대를 방 안에 펼쳤을 때 길이 막혀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야 하는지 그냥 옆으로 비켜갈 수 있는지를 가르는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빨래 건조대를 펼쳤을 때 침대가 침범받지 않는 공간인지 아닌지는 생존에 딱히 관련이 없지요. 하지만 최소한 빨래를 널었다고 해서 가구를 넘어다녀야 하는 일이 없고, 프라이팬에서 튄 기름 방울이 널어 놓은 빨래에는 닿지 않는 공간이 '인간적' 이라는 데는 다들 동의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청년 주택 전용 면적이 지나치게 넓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고요.
고대 그리스에서는 우리가 '삶' 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서 불렀습니다. '조에(zoe)'는 살아 있는 것, 즉 생존을 뜻하는 것으로서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물에게 공통된 개념입니다. 반면 '비오스(bios)' 는 인간이 살면서 취하는 삶의 형태, 방식, 가치와 의미가 깃든 삶으로서, 현대어로 말하자면 '인간다운 삶', '인간(시민)의 자격이 보장된 삶'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삶(bios)은 국가 권력과 자본의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국가 권력을 먼저 보자면 각종 복지 정책부터 시작해서 전시나 비상 사태에 국가가 어떤 사람을 자국민으로 인정해서 보호하는 등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안전, 신분 보장, 삶에 필요한 인프라를 제공하는 등의 역할입니다. 자본이야 물론이지요. 우리는 생체로서의 삶도 건강과 수명이라는 관점에서, 돈을 내고 전담 케어를 받는다거나 몸에 좋은 식단을 택한다거나 해서 구매할 수 있으며, 사회적인 삶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삶의 가성비란 인간적 삶을 잊어버리고 삶을 생존으로만 취급하여 나타나는 참으로 무시무시한 개념입니다. '사회적', '인간적', 사회와 인간성 속에서 발달하는 영혼은 손에 잡히고 숫자로 환산되지 않아 6제곱미터의 공간 효율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좁은 공간은 그 자체로 삶의 축소를 표상합니다. 수납 효율이 가구를 살 때 고려할 수 있는 전부라면 그 방의 주인은 세상의 가구점들과 인연이 없을 것이며, 욕조가 없는 집에서 산다면 입욕제를 쓸 일이 영영 없습니다. 제품을 구매할 이유가 없는 것 이상으로 혼자만의 목욕을 할 일이 없을 것이며, 조용히 몸을 물에 담그고 휴식을 취하는 행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상상과도 멀어집니다. 온천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대체 저런 낭비는 왜 하는 거냐고 투덜거리게 될 수도 있겠지요.
사회적 삶에서 소외될수록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가 됩니다. 아는 데까지가 세계이고 세계의 범위만큼 영혼이 도약할 가능성이 있다면, 현대에 이르러 각자가 느끼는 세계는 모두 크기가 다르고 이는 권력과 자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삶에서 경제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기에, 지금 시대 우리는 더욱 최소한의 비용을 쓰더라도 최소한의 인간적 삶이 보장되는 세계를 원해야 하겠습니다. 최소한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최소한 살 만하게 사는 것.
현대 철학자들은 바로 이런 인간적 삶을 뜻하는 생명의 의미를 들어 '생명 정치', '화폐화된 생명' 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정치와 자본이 인간성을 지배하려는 이 시대에 인본주의(人本主義)가 대두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사상이 우리에게 필요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