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즈 Aug 20. 2020

(25) 먹고 마시기의 세 가지 차원

식사는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채우는가


스엠 씨가 취미 이야기를, 가연성 씨가 입는 이야기를 해 주셨으니 제 차례에는 우리 인류의 유구한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바로 먹는 이야기입니다.


현대에 요리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개념이 되었습니다. 고대에는 날것으로 먹기 어려운 식재료를 섭취하기 위해서, 무척 실용적인 이유로 시작되었던 조리는 각 지역마다 고유한 식문화로 발전하게 되었지요.


고대 이집트의 식사를 묘사한 벽화


근세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요리는 귀족과 같은 특별한 계층이 즐기는 문화였습니다. 서민들은 먹고 살기 바빴기에 손이 많이 가는 요리보다는 모든 것을 냄비에 넣고 끓이는 단순한 조리법을 택했고, 식재료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지요. 대항해시대가 오기 이전 유럽에는 감자도 토마토도 없었다는 점이 믿어지시나요?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재료들을, 도구를 가지고, 더 맛이 좋은 음식으로 만드는 요리가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습니다. 운송과 보존 수단의 발달로 식재료는 전 세계에서 신선한 상태로 부엌에 도착합니다. 예전에는 놀라운 마법책 같았던 조리법은 인터넷 검색 한 번만으로 손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리의 기술은 물론 먹고 마시는 일의 즐거움, 바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 질긴 풀은 어떻게 가공하면 더 맛이 좋아질까요? 감자만 쪄서 먹기보다는 크림을 섞어서 부드럽게 만들면 어떨까요? 콩은 갈고, 고기는 미리 간을 하고, 숙성을 위해 실온에 얼마간 방치하고……. 


미식 다큐멘터리라도 본다치면 세상에는 얼마나 기상천외한 발상의 요리가 많던가요. 재료 배합도 음식을 만드는 아이디어도 예술에 가까운 창의력을 발휘한 작품이 됩니다. 유명 레스토랑의 쉐프는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직업이지요.


싱가폴의 프렌치 컨템퍼러리 레스토랑, Saint Pierre의 플레이팅.

  

먹고 마시는 일의 첫 번째 차원이 생존을 위한 섭취 그 자체라고 한다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식문화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두 번째 차원―먹는 일에서 얻는 감각적 즐거움의 단계이자 상대방이 체험할 감각을 디자인하는 즐거움의 단계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먹고 마시기의 세 번째 차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글로부터 두 편 전에, 스엠 씨는 '한 사람의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물과 빵 만이 아니라 때로는 홍차와 케이크도 필요합니다.' 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생존에서 맛으로 옮겨왔습니다. 맛에서 그 다음으로 도약할 수 있을까요?


물과 빵, 그리고 홍차와 케이크. 둘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살아가기 위해서 물과 빵을 먹는다는 행위는 그 이상의 어떤 모습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배를 채운다는 목적만 생각하자면 물과 감자를 먹어도 밥과 간장을 먹어도 마찬가지이겠지요.


반면 홍차와 케이크를 먹는 데서는 기호가 느껴집니다.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내용은 상관없다' 에서 '기분에 따라 당근 케이크를 먹을 수도 있고 치즈 케이크를 먹을 수도 있다' 로 진화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자면 '당근 케이크를 놓는 접시와 치즈 케이크를 놓는 접시를 각각 다른 종류로 고를 수 있다' 까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행위는 이제 생존에서 충분히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잘 보면 맛에서도 멀어져 있습니다. 같은 치즈 케이크를 동그란 흰 접시에 놓든 네모난 파란 접시에 놓든 맛은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건 포장 상자를 뜯고 그냥 먹어도 똑같겠지요. 그러나 무엇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색깔의 접시를 사게 할까요? 


먹고 마시기의 세 번째 차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먹고 마시기의 세 번째 차원은 바로 비 실용적인 개념의 차원, 음식이나 먹기라는 행위를 초월하여 인간성이 발휘되는 추상의 차원입니다.


먹고 마시기를 목적으로 하지만, 먹고 마시는 것을 초월한다.


이 이상한 문장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식음에 관한 행위 중에서도 형식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한 분야를 들여다볼까 합니다. 바로 다도(茶道)이지요.


일본 다도를 행하는 모습


차는 음료입니다. 문명 이전 인류의 입장으로 보자면 차는 좀 특이한 풀이거나(기원전 3,000년쯤에 차는 약초로 취급되었습니다.) 목을 축이는 용도입니다. 현대 요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솜씨를 동원해서 이 음료를 최대한 맛있게 마시면 됩니다. 


일본 다도에서는 차 한 잔을 만들기 위해 일단 다도용 손수건을 7단계에 걸쳐서 접습니다. 차가 들어간 통을 한 번 닦고, 수건을 도로 펴고, 다시 수건을 7단계에 걸쳐서 접습니다. 이제 차를 더는 숟가락을 닦습니다. 다시 수건을 펴고…….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일본 다도 유파 중 하나인 우라센케(裏千家) 식으로 차 한 잔을 만드는 과정. 잔에 가루를 넣고 물을 부어서 휘젓기만 하면 되는 차이지만, 다도 절차를 따르면 약 6분이 걸립니다.


현대 레스토랑에서도 맛과 상관없이 눈의 즐거움을 위해 요리에 몇 가지 연출을 더하는 일은 있습니다. 그것은 식탁 위의 작은 여흥거리이고, 식사의 즐거움을 북돋아 준다는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도라는 이 이상한 행위는 정말 지루해 보입니다. 규칙에 기능적인 이유도 없습니다. 손수건을 세모로 접든 네모로 접든 맛에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은 행위이지요. 그럼에도 다도는 수백 년 된 문화입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여기에 시간과 노력을 쓴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왜 이런 행동을 할까요?


음료는 식문화에 포함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음료는 물과 다르고, 식사와도 다릅니다. 먹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지요. 어떤 사람이든 평생 다도를 모르고 살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생존은 물론이고 영혼의 풍부함도 다른 취미로 얼마든지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필수가 아님' 에서 취미 활동의 정수, 다르게 말하자면 인간 영혼의 정수가 발휘됩니다.


두 가지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시간을 넉넉히 두고 차린 음식을 앉아서 먹는 것과 일정에 쫓겨 선 채로 후루룩 밥을 말아 먹고 그릇도 팽개치고 나가기. 같은 음식이라고 생각하자면 맛도 기능도 동일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앉아서 먹는 편을 선호하겠지요. 식사는 배를 채우기가 목적인데 왜 길게 앉아서 먹으려고 할까요? 반찬통에 담긴 나물을 그대로 먹기보다 그릇에 정갈하게 덜어서 내놓은 반찬을 먹는 일이, 왜 중요할까요?


다도는 말하자면 허겁지겁 밥을 말아 먹는 행위의 대척점에 있습니다. 목적은 있지만 목적 지향적이지는 않습니다. 빠른 식사는 배를 채운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므로 빨리 먹고 나가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기능적으로, '차를 (맛있게)마시기' 를 목적한다면 적당한 그릇에 온도가 맞는 물을 타서 마시면 됩니다. 하지만 다도는 차 수건을 일곱 번 접는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복잡한 의식들이 재미있는 점은, 모든 절차들이 차를 위해서 있지만 기능적으로 차를 위해서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개념적으로 차를 위해서 있는 데 가깝습니다. '물을 뜨는 국자는 손잡이에 마디가 있는데, 그 위치를 잡아야 한다.' 라거나 '차를 휘젓는 솔은 들어올릴 때 손목을 반 바퀴 돌린다.' 하는 규칙들은 차 맛과 상관없이 존재하지만 차를 만들 목적이 아니라면 결코 적용되지 않는 규칙이기도 합니다.


특정 목적을 위해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비 실용적인 행위. 낯설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고대의 수많은 의식이 그랬고, 종교가 그랬으며, 문명이 그러했습니다. 바흐의 그 아름다운 미사 B단조가 신에 대한 찬양 없이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형식이자 의식은 인간이 꼭 필요하지 않지만 스스로 선택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차 수건을 일곱 번 접고 물건 하나를 닦고 다시 일곱 번 접는 일은 그냥 수건을 백 번쯤 접었다 폈다 하는 일과는 다릅니다. 형식은 언제나 목적을 향하지만, 목적만을 위해서는 아닌 채로 장엄함을 유지하며, 그리하여 문명의 굳건한 내적 질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기의 세 번째 차원. 그것은 살기 위해 살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생존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지만 또한 오직 생존을 위해서만은 아닌, 개념을 추구하고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 영혼에 맞닿아 있는 평온의 차원입니다. 다도는 아마도 그 극단적인 예지만 우리가 원하는 모든 식사에 이 세 번째 차원 또한 조금씩 스며들어 있을 겁니다. 치즈 케이크에 파란 접시를 써 보고 싶어하는 식으로요.

매거진의 이전글 (23) 당신의 취미는 무엇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