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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비 Aug 14. 2024

여성이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사회를 위해서

<87년생 김지영>을 읽고


2019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나는 87년생이다. 82년생 김지영이라…. 나보다 5년 먼저 빛을 본 사람이 바라본 세상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하며 첫 장을 펼쳤다. 5년이란 시간은 초등학생으로 치면 6학년과 1학년의 차이 정도밖에 되지 않듯 내가 겪어온 삶을 어쩜 이리 잘 아나 싶을 정도로 나의 인생과 겹치는 부분이 참 많았다. 정신과 의사의 목소리로 정리되는 김지영 씨의 인생은 대한민국 여성이 흔하게 겪는 살아있는 이야기였고 우리 주변의 어머니, 여동생, 딸들이 겪어온 이야기였다.


김지영 씨는 출산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런 일은 우리나라에서 부지기수라는 것을, 현재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당사자이거나 그 친구이거나 가족인 사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아니 조금 더 보태서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양성평등을 강조하며 평등하게 미래와 꿈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여학생들은 정작 결혼과 출산의 고비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육아에 매진하는 게 현실인 것이다. 물론 육아란 모성애를 강조하듯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일꾼을 키워내는 일이라는데 의미를 부여하면 거룩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듯 왜 그것이 여성의 희생 위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지, 남편들은 왜 그저 돕는 사람일 뿐인 건지, 맘충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자조적인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그저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


얼마 전 대통령 영부인, 김정숙 여사께서 스웨덴의 라테파파들을 만나고 피카타임을 갖고 왔다는 뉴스를 기사로 접했다. 라테파파란 한 손에는 라테를, 한 손에는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아빠를 칭하는 말이고 피카는 커피와 함께 하는 휴식 타임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언론을 통해서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그리고 국가가 함께 키워야 한다"며 "아빠도 아이들에게서 사랑받아야 하며 아이들을 양육하며 성장할 기회를 아빠도 가져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발언이 지금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하더라도 점차 사회의 변화를 불러오는 데 미약하나마 힘이 될 거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현재 스웨덴의 남성 육아 휴직률은 75%라고 한다. 영부인의 생각, 스웨덴과의 만남과 발언이 1회성 쇼에 그치지 않고 진정으로 사회가 변하기 위해서는 우리부터가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 아빠 육아휴직자도 늘어 단순히 집안일, 육아를 돕는다가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이 늘었으면 한다.


책에서 다룬 문제는 육아전담문제뿐이 아니다. 김지영 씨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집안에서의 남녀차별, 초등학교에서 짝꿍의 부당한 괴롭힘 및 교사들의 성추행, 학원에서 만난 남학생의 폭언, 대학생 때 있었던 복학생 선배의 막말까지 김지영 씨는 살아오면서 정말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김지영 씨가 어려서는 남동생이 아들이라는 이유로 참아야만 하는 일이 많았다. 갓 지은 따뜻한 밥은 아버지, 동생, 할머니 순서로 퍼 담는 것이 당연했고, 모양이 온전한 음식은 동생이 먹고 언니와 김지영 씨는 부서진 조각들을 먹는 것이 당연했다. 젓가락이나 양말, 내복 상하의,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들이 동생 것은 온전하게 짝이 맞는데 언니와 김지영 씨 것은 제각각인 것이 당연했다. 우산, 이불, 간식까지 두 개면 동생이 한 개를 쓰거나 먹고 김지영 씨와 언니가 나머지 한 개를 나눠 쓰고 먹었다. 미약하게나마 이 이야기는 내가 겪어온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릴 적, 나의 어머니는 맛있는 반찬이 있을 때면 언제나 남동생을 먼저 챙겨줬고 나는 은연중에 상처를 가슴에 새겼다. 그러나 김지영 씨의 가족만큼 심하지는 않아서 그것이 남녀차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김지영 씨가 그랬던 것처럼 동생이니깐이란 생각으로 무심코 넘어갔다. 지금도 어머니는 남동생과 나를 비교하며 남자는 되지만 여자는 안 된다는 류의 발언을 종종 하신다. 이를테면 남자는 결혼을 안 해도 되지만, 여자는 꼭 결혼해서 남편을 모시고 아이들을 키워야 팔자가 편하다는 말 등. 그래서일까. 김지영 씨 아버지가 김지영 씨에게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라고 한 말이 더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생각해 보면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세대는 그러한 생각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김지영 씨의 어머니 이야기처럼 나의 어머니도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공장에서 일하고 돈을 벌어 나의 외삼촌인 남동생, 이모인 여동생을 보살폈다. 지금도 가끔 무용담처럼 어머니께서 공장에서 번 첫 월급으로 선물을 바리바리 사가면 가족들이 기다리고 환호했다는 말씀을 하신다. 난 그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는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고등학교 졸업장도 검정고시로 취득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외삼촌과 이모는 첫째인 나의 어머니의 뒷바라지로 부유하게 잘 사신다. 가끔 우리 어머니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뒷받침으로 정상적으로 학교를 졸업했으면 지금보다 더 여유롭고 행복하게 사시지는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초등학생 때 짝꿍의 괴롭힘으로 괴로워하던 김지영 씨의 이야기도 그저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김지영 씨 이야기이기 이전에 내 이야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상처의 경중을 가늠할 순 없겠지만 나는 심지어 초등학생 때 같은 반 남학생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기도 했었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았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다. 너무 쑥스럽고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선생님, 부모님께도. 그런데 오히려 그 남학생은 당당했고 자신이 나를 만졌다고 친구들에게 떠벌리고 다녔다. 지금은 나 혼자만의 상처로 남고 다른 친구들은 모두 잊은 것 같긴 하지만, 내가 동창회에 나가지 않는 깊은 상처의 이유가 되어버렸다. 부질없지만 가끔 상상하곤 한다. 그때 내가 선생님, 부모님께 알렸다면 어떤 반응이 돌아왔을까? 정말로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김지영 씨 담임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다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야라며 회유와 설득으로 서둘러 상처를 봉합하려 하지 않았을까? 심했으면 요즈음 미투(Me Too) 운동의 피해자들이 그렇듯 2차, 3차 가해로 고통받지는 않았을 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피해자가 웅크리고 숨고 피해 다녀야 하는지 정말로 당해보지 않으면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아서 절망스럽다.


김지영 씨를 쫓아와서는 “너 항상 내 앞자리에 앉잖아. 프린트도 존나 웃으면서 주잖아. 맨날 갈게요, 그러면서 존나 흘리다가 왜 치한 취급하냐?”라고 충격적인 발언을 한 남학생 일화도 내가 겪은 일이기도 했다. 심한 욕을 듣지는 않았지만…. 대학생 때 집에 인터넷이 갑자기 안 되어서 수리 기사를 부른 적이 있다. 찌는 듯한 불볕더위에 일하시는 분의 수고가 염려되어 웃으면서 주스 한 잔 내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 인터넷 수리 기사는 주말에 갑자기 내 개인번호로 전화를 걸어와 데이트를 신청했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함부로 웃어주면 안 되는구나, 친절도 베풀면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너무 놀랐었다. 그 이후로 내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남자들이 굳이 여자의 팔뚝에 있는 부드러운 살 부분을 만지는 것, 가슴을 툭툭 건드리는 것과 같은 류의 성추행도 다 내가 경험해 본 일이다. 회식 자리에서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는 일, 굳이 등 뒤에 브래지어 끈 쪽을 쓰다듬는 일, 결혼 안 한 여직원을 두고 음담패설을 하는 일, 성희롱 등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었고 그래서 더 공감이 갔다. 가끔은 너무 무서울 때가 있다. 여자로 살아가는 게 왜 이렇게 험난하고 어려울까.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이 도처에 가득한 걸까. 우리는 왜 존재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이렇게 성적 대상화되어 물건 취급받아야 할까 하고 말이다.


물론 여성 할례(의료적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종교 또는 문화적 관습 때문에 여성의 생식기 일부를 절제해 손상을 입히는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동과 아프리카보다는 사정이 나을 수 있겠다. 명예 살인(순결이나 정조를 잃은 여성 또는 간통한 여성들을 상대로 자행되어 온 관습)이 행해지고 있는 요르단, 이집트, 예멘 등 이슬람권 국가들보다는 사정이 나을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불합리한 상황을 합리화하고 무작정 당하고 있기보다는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개선하는 데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라는 게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이다. 김지영 씨를 좋아했던 반듯한 남자 선배로부터 “아,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모멸감과 수치심은 여성의 순결과 정조만을 중요시하고 강조했던 방탕한 대학 남자 선배로부터 들어야 했던 야멸차고 모욕적이었던 언행이 정확히 오버랩되었다. 그는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퍼뜨린 헛소문만 듣고 나에 대해 폭언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겁을 먹게 만들었다. 나는 심각한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김지영 씨가 지난 세월의 아픔과 고통으로 결국 산후 우울증을 넘어 육아 우울증의 심화로 빙의 현상을 겪어야만 했던 것처럼 나 또한 아직도 트라우마와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내가 왜 이렇게 아플까, 힘들까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나조차도. 내가 뭘 잘못했기에 그런 부당한 일들을 겪어야만 했을까 나 자신을 자책하고 돌아보고 힘겨워했다. 


아이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을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갔다. 


김지영 씨가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한 부분에 적힌 대목이다. 이것은 꼭 내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나는 아무 잘못한 것이 없음을. 그저 나는 사회 모순과 차별의 희생양이었음을….


김지영 씨가 같은 학원 남학생한테 심한 모욕을 당할 때 도와줬던 여자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고, 자신도 많이 겪었다고, 이상한 그들이 문제지 학생은 잘못한 게 없다고. 그리고는 “근데,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라고 했다. 


이 이야기 부분에서 나는 희망을 얻었다. 범죄피해는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김지영 씨가 겪었던 일들, 그리고 내가 겪었던 아픈 상처의 기억들이 몸가짐을 잘못해서, 조심하지 않아서, 밤늦게 돌아다녀서, 헤퍼서란 이유를 들먹이며 피해자 책임론으로 뒤집어씌울 일들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폭력적인 말을 내뱉고 서슴없이 몸을 만지고 성적인 농담들을 내뱉는 그들의 잘못이라고. 그리고 세상에는 꼭 그렇게 나쁜 사람들만 있지 않다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면 여자보다 더 여자의 권리를 위해 앞장서고 양성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유명인, 독서모임에서 만난 운영자, 직장에서 만난 선배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세상 이치가 그렇듯 언제나 나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불합리한 부분만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성의 권리와 안전한 사회 보장을 위해 싸워가는 길이 녹록지만은 않을 것이다. 김지영 씨의 이야기를 전해준 정신과 의사는 김지영 씨의 인생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여성 억압 및 차별에 대해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결국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준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라며 임신 및 출산 문제로 그만둔 여직원을 대신해 골치 아프니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고 말하며 이야기가 끝을 맺는다. 반성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이고 작가는 이 부분을 통해 여성이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워가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여성이 참정권을 얻은 것도 20세기 초반에 와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의 투옥과 목숨을 건 사투가 있었다. 언제나 변화를 시도할 때는 잡음이 많고 반대가 거세게 일어나기도 하는 법이다. 실제로 독서모임에서 이 책에 관해 토론했을 때 거세게 작가를 비난하고 책의 수준을 가치 절하한 남자분이 있었다. 그 남자 입장에서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나 보다. 공감을 할 수 없어서 그랬겠지만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실제로 이 소설의 완성도, 작품성 여부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키고 세상의 관심과 변화를 위한 첫걸음에 힘을 실어준 것만으로도 대단하게 생각한다고.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도 공감도 어려울 수 있겠지만 설사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거 아닐까 싶다고.


책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김지영 씨가 겪은 일들이 한 사람이 모두 다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허구를 사실처럼 쓴 소설일 뿐이다, 남자 버전도 쓸 수 있겠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김지영 씨가 겪은 일들은 위에도 적었지만 내가 낱낱이 겪었던 모든 일이 오버랩된다. 소설이란 원래 있음 직한 일을 작가 나름의 상상력으로 쓴 허구의 문예이다. 남자로서 겪는 부당함이 있었다면 그것도 82년생 김지영처럼 소설로 써볼 수 있겠지만 이 책처럼 통계적으로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그런 부당한 사회 차별 및 억압들을 많이 겪는지는 의문이다.


중요한 건 남녀가 편을 갈라 싸우고 이성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 차이를 좁혀나가려고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김지영 씨가 살던 시대보다는 미약하게나마 상황이 좋아졌다는 생각은 든다. 한 예로 김지영 씨 시대에는 급식 먹는 순서 및 번호가 항상 남자부터였다면 지금은 가나다순으로 하거나 남녀 돌아가면서 순서를 정하니깐 말이다. 해리포터에서 헤르미온느 캐릭터로 널리 알려진 배우 엠마 왓슨은 UN 연설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이 땅의 김지영 씨 같은 사람들이 더는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평등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물려주기 위해 오늘부터 바로, 끊임없이 자각하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억압받지 않는 세상,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고 마친다.


이 땅의 모든 김지영 씨와 정지원 양(김지영 씨의 딸)이 행복한 세상을 위하여…. 그들이 곧 우리고 우리가 곧 그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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