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외할아버지는 북한에서 피난 오신 분이다. 북한에 처자식이 있었지만, 남한으로 내려온 후 소식이 끊겨서 우리 외할머니를 다시 만나셨다. 그리고 엄마와 외삼촌, 이모를 낳으셨다. 북한에서는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까지 하셨었지만, 남한으로 내려온 후, 이런저런 사업을 한 후 가세가 기울어 우리 어머니가 맏이로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자식들이 결혼한 후, 대전인 외삼촌 댁에 사셨는데 초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외할아버지와의 기억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엄마가 차곡차곡 모아놓은 앨범 사진을 보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나를 얼마나 예뻐하셨는지 안다. 포천의 외가댁을 정리하기 전에는 항상 그곳에 놀러 갔는데, 내가 왕목걸이를 목에 걸고 바닥에 누워 발차기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외할아버지 사진도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내 책가방은 외할아버지가 사주셨다. 외할머니가 남동생을 업고 나와 꽃밭을 헤치며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기간제 교사하던 시절에, 외할머니가 사시던 이모 댁에 자주 가곤 했는데 내 옷에 단추가 떨어진 것을 보고 서둘로 달아주신 외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그립다. 내가 한창 야자로 정신없는 고등학생이 되고, 교직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쁘던 신규 교사이던 시절 두 분이 차례차례 하늘나라도 돌아가셨는데, 더 많은 추억을 쌓지 못해서 후회되고 슬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 아빠 쪽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두 분 다 돌아가셨다. 사실 할머니와의 기억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아빠의 새엄마이기 때문에 아빠와도 가깝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할아버지 댁에 가면 자두나무에서 자두를 따거나 채소를 따서 바리바리 챙겨주셨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2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나에게는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커서 늘 그 부분에 대해서 서러움을 느끼셨었다. 그러나 씩씩하게 커서 엄마를 만나 가정을 일구고 노년인 지금은 낚시를 취미로 즐기신다.
아빠와 엄마는 현재 따로 살고 계시지만 아빠가 이 주나 삼 주에 한 번 정도 엄마가 살고 있는 집으로 오시고 엄마도 아빠가 살고 있는 집으로 왕래한다. 아빠가 도시 생활보다 시골 생활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자그마한 텃밭도 가꾸시고 수확한 과일이나 채소로 도시에 있는 우리 집에서 요리해 먹는다. 집에서 딴 자두로 쨈을 만들어 먹거나 상추로 고기쌈을 먹는다.
어릴 적, 나는 부모님이 일을 나가시면 퇴근하고 돌아오시기 전에 집 청소를 깨끗이 해놔서 칭찬을 받곤 했다. 사실 요즘은 시간이 거꾸로 흘러 오히려 더 어리광을 피우는 것 같다. 소중한 우리 가족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도록 나부터 건강해지고 씩씩해져서 든든한 맏딸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