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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선택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by 루비


중학생 때 친구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무심코 ‘불쌍하단’ 단어를 썼다. 그냥 안타까운 누군가를 향해서 했던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친구는 나에게 갑자기 화를 냈다. 그런 단어는 함부로 쓰는 게 아니라고 했다. 엄마가 안계시고 아빠와 살면서 동생들을 돌보던 친구의 말에 나는 그런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되돌아보았다. 그 친구가 나중엔 나를 너무 미워하고 따돌려서 힘들었지만 지금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이타니 겐지로의 <내가 만난 아이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오키나와 말에는 '가엾다' 같은 동정적인 표현이 없다. 오키나와에서는 남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뉘앙스를 가진 '치무구리사(가슴 아프다)'라는 표현을 쓴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때 친구를 떠올렸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단어가 아닌 같은 눈높이에서 공감하는 뉘앙스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 그게 진짜 상대방의 아픔을 나누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나는 사람들한테 온갖 욕설에 불쌍하단 말도 들어봤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는데 나란 존재를 불쌍하게 여기며 따돌리고 조롱하는 걸 당연시했다. 내가 왜 그들한테 그런 존재가 되어야하는지도 모른 채. 그런 행동이 잘못된 걸 몰랐던 걸까? 잘못된 행위라는 걸 몰랐다면 왜 내가 모든 사실을 밝혔을 때 나를 거짓말쟁이에 소설 쓰는 애 취급하고 그런 적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걸까. 나는 수차례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로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번번이 나의 노력은 좌절되었다. 일방적으로 나를 비난하고 어떤 말도 들어주지 않았다.


<플랜더스의 개>에도 <소공녀 세라>에도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서 많은 아픔을 겪는 주인공들이 나온다. 그때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따돌리고 괴롭히기도 하고 모욕을 준다. 지금은 세계명작이 된 소설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인데 왜 현실에선 여전히 나쁜 사람들이 많은 걸까? 세상에 위선자 투성인 걸까? 미국의 의대에서는 소설 창작 수업도 있다고 한다. 그래야 환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 커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감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행위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의 신발을 신어보아야만 그의 입장에서 헤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과연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행복마저도 값싼 싸구려 만족감이라 비하하기도 한다. 그들이 말하는 행복이란 다이아몬드를 두르고 궁전 같은 집에서 시종을 부리고 사는 것일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작은 오두막집에서도 자연을 벗 삼으며 동식물을 관찰하고 책과 글쓰기로 하루를 보냈다. 그의 문장은 어떤 다이아몬드나 사파이어, 루비보다도 더 아름답게 빛이 난다. 나라면 그런 아름다운 문장을 짓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름다운 문장을 지어 올려 다른 사람에게 상처 같은 것은 주지 않는 사려 깊은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기준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세상의 기준은 물질이 전부겠지만, 나는 하이타니 겐지로처럼,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사람들을 배려하고 소중히 여기는 어여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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