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예술교육의 활성화를 꿈꾸다

프롤로그

by 루비

오래전(3년 전)에 써두었던 글입니다.




초등학생 시절, 나와 남동생은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실제로 소년한국일보 미술대전 등 교내외상도 다수 수상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완강하셨다. 미술은 돈이 많이 든다며. 공부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나는 모범생이 되어서 학교 시스템에 완벽하게 적응해 나갔다. 그게 원인이었을까. 1학년 입학 당시만 해도 말괄량이에 개구쟁이 소리 듣던 나는 어느새 소심하고 주눅 든 위축된 아이로 변하고 말았다. 자유롭고 개성 강한 내 성격은 학교 시스템에 완전히 억눌렸다.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하교 후에 집에 돌아와서 맘껏 발산했다. 우리 집은 그 당시 작은 농촌 마을에 위치하고 있어 봄에는 봄꽃을 구경하고 여름에는 개울가에 놀러 가고 가을에는 밤나무 아래 밤을 주우러 다니고 겨울에는 쌓인 함박눈을 자박자박 밟으며 사계절의 여흥을 즐겼다. 그때의 경험이 나의 감성과 무의식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학교 동시대회에서 ‘바다’라는 시로 최우수상을 타서 학교 대표로 나가기도 하고, 그림 그리기와 피아노 연주를 즐기는 아이로 성장했다. 남동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남동생은 현재는 웹툰 작가를 꿈꾸고 있다.


그런 내가 지금은 딱 짜인 틀 안에서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초등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내가 첫발을 내디딘 2010년만 해도 그 분위기는 더욱 심각하였는데, 개성 강하고 자유롭고 감성적인 나는 관리자와도 동료교사와도 사사건건 부딪쳤다. 언젠가 내가 맡았던 3학년 여자아이가 인터넷에 떠돌던 시구를 가져와 ‘학교는 감옥’이라는 창작 동시를 지은 적이 있는데 내 심정이 딱 그랬다. 교사인 나에게조차 학교는 감옥이었다. 해야만 하는 일 리스트, 해서는 안 되는 일 리스트 수백 개씩 목록이 있고 거기서 조금만 어긋나도 바로 정으로 두들겨 맞는 곳. 나에겐 그런 곳이었다. 분명 사람들은 나처럼 부드럽고 감수성 풍부한 선생님이면 학교 선생님으로 딱 맞는다며 아이들이 참 좋아할 것 같다고 말하는데 현실은 전혀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공감적 대화를 하고 다가가며 감성 풍부한 시인의 역할을 하며 자연의 목소리를 들려주면 학업에 열중한 학생들은 나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대했다. 스물아홉 여름, 우리 반 6학년 아이들 30여 명에게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껴봐.”라고 말했을 때 나를 쳐다보던 눈빛이란...


너무 힘든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날, 주말에 지상철 역에서 무수한 아파트 단지를 쳐다보는데 평온해 보이는 아파트 불빛과 내 현실이 너무 대조되어서 어찌나 허탈하고 허무했는지 그때 내 심정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나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에서 괴로워했다.


곰곰이 되짚어보면 언제나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2년 차에는 작은 산촌마을에서 1학년 6명을 맡으며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해서 마트에서 우연히 만난 학부모님께 “저는 서윤이 때문에 정말 행복해요.”라고 말하기도 하고, 3년 차에는 교내 합창반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에게 “매일 합창반만 하고 싶어요.”라는 말을 들어 기쁘기도 하면서 아이들을 달래주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4년 차에는 6학년 15명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1년을 마무리했으며 6년 차에는 다시 1학년 30여 명을 맡으며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동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당시 한 남학생이 내게 “선생님은 제 꿈을 이뤄주셨어요.”라고 말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현장 체험학습으로 동물원에 가서 코끼리를 본 것이 생애 처음이라면서.


어쩌면 각종 학교에 산재해 있는 문제의 열쇠가 내가 경험한 것에 그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동료 선생님들로부터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해야만 했을까. 아이들은 왜 가장 만만하고 약한 학생을 따돌리고 서슴없이 학교 폭력을 저지르는가. 왜 우리 반 제자들은 나의 권위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학교를 난장판으로 만드는가. 왜 학교 안팎으로 힘든 사람들이 넘쳐나며 학생들의 자살률은 OECD가입국 최고를 달리는가. 혐오와 배척으로 파생된 문제는 결국 가장 약한 곳에서 폭력으로 터진다고 한다. 나는 동료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학생들 사이에서도, 사회에서도 최약자였다. 어디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아무에게나 얻어맞는 존재처럼 여기저기서 상처받고 다녔다.


그러고 나서 나는 한 가지 꿈을 꾸게 되었다. 니체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매일같이 저녁 늦게 퇴근하고 누구보다 교재연구를 열심히 하고 가장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면서도 한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 구조의 불합리함과 폭력을 경험했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에 시련과 좌절을 경험하고 나서 내 인생의 의미, 로고스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학교를 예술적인 풍토로 만들어나가자고. 발길 머무르는 곳 어디에든지 예술이 넘쳐흐르는 곳으로 만들자고. 죽고 싶고 허무하기만 했던 나를 소생시킨 것이 예술이었으니깐... 글쓰기, 시 쓰기,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 등등. 사회는 예술을 사치로 취급했지만, 내게 예술은 생존이었다. 세상이 몰라준다고 해서 내가 예술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고통 속에서, 예술은 내게 마지막 숨구멍이 되어주었다.


가장 부유하고 발전된 형태의 나라에서는 예술 문화가 널리 향유된다고 한다. 산업화 시대를 거쳐 단기간에 발전한 우리나라에는 아직 그런 문화가 정착될 여유가 없었다. 그런 배경이 예술을 즐기는 나의 취향과 가치관이 별나라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거나 가진 것도 없으면서 고상한 척, 젠체하는 가식쟁이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제는 사회 저변에 남녀노소, 부자와 빈자, 정규직, 비정규직, 인싸, 아싸 그 누구와 상관없이 모두가 예술을 즐기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밑거름은 바로 학교가 예술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