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에 명동성당에서 예비신자교리를 들었다. 그때 새해를 앞두고 수녀님께서 하신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답은 ‘하루’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명’이라고 대답했지만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는 이 ‘하루’의 소중함, ‘생명’의 소중함을 잊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아서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만약 오늘 밤에 눈을 감았는데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면 내일의 하루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맞이하며 일어나는 아침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어릴수록 자주 망각하 지만, 나이가 들수록 건강도 쇠약해지고 사회적 책임감은 늘어난다.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게 남아있는 사람으로서 무거운 죄책감을 느낀다.
삶을 포기하는 이유는 아마도 더 이상 살아갈 가치를 못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것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음을 택해서 잊고 싶은 마음은 아닐까란...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평일에는 아침 출근이 너무 싫어서 출근 시간에 맞추어서 겨우겨우 일어나 직장으로 향했고 퇴근하고 돌아와서는 다음날 아침까지 또다시 잠만 잤다. 그리곤 주말만 기다리며 살았다. 나에겐 주말이 유일한 숨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평일은 죽을 만큼 괴로웠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에겐 직장에서 ‘주도성’이 제일 중요하단 것을 깨달았다. 허드렛일만 맡고 제대로 인정도 못 받고 함께 유쾌한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게 나를 갉아먹었다.
만약 어떤 일을 열심히 하는데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점차 지치고 자기 비하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그리하여 호주 같은 사회복지가 발달한 나라도 우울증이 많다고 하는 거 아닐까? 무언가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계속해서 발전하고 성취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 모든 게 처음부터 주어지면 만족감이 떨어지고 오히려 모난 성격이 되기 쉬운 것도 같은 이유란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게 완벽하지 않다고 자학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위인이나 성인으로 남은 사람들의 프로필을 보면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란 경우도 많다.
나는 마음이 힘들고 울적하고 죽고 싶을 때마다 소설을 읽으며 힘을 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다시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문득 이건 나만의 경우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쩌면 책이라도 읽을 삶의 여유와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구나 싶었다. 책도 읽지 못할 정도로 힘든 사람들은 어쩌나란 생각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정말, 사람은 다른 사람을 쉽게 이해하거나 공감한다는 말을 하기는 어려운 게 아닐까 싶다.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자포자기에 빠진 상태의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
그리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 더 다정하고 조금 더 친절하고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보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다들 내색은 안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조용히 마음속에서 자기만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을지도 모르니깐... 약하고 여린 그들이 작은 바람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다정한 말을 건네고 따스한 눈빛을 보낸다면 얼어붙은 그들의 마음도 조금은 온기로 차오르지 않을까.
서로가 서로를 무너뜨리는 공격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질 것 같은 힘겨운 상황에서도 버팀목이 되어주는 연대의 힘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