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기 싫을 만큼 지쳐 버리는 순간이 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 가장 필요한 건 ‘웃음’이다. 나는 노량진에 있을 때 강남교회에서 하던 웃음치료 수업에 참여해 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가득한 곳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어려 첫 수업에 멋쩍게 있다가 그 후로 다시는 안 갔지만... 웃기 위해 시간을 내서 참여한 어르신들을 보면서 참 건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웃음을 잃으면서 삶에 절망하고 화가 나고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괜히 화풀이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많이 많이 웃고 싶다. 하지만 그 웃음이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웃는 그런 걸 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사람들과 따스하게 건네는 인사말, 마음이 힘든 이를 위해 위로해 주는 격려의 말, 외로운 이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에서 웃음이 나오는 것 같다.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와 제비는 모든 걸 내주고 천국에 도달했듯이 자신을 내어주면 결국 삶에 더 큰 기쁨이 찾아오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물론 누군가는 사후 세계 같은 건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법정 스님이 하신 말씀처럼, 마음이 외롭고 힘들고 슬플 때 나를 지켜주는 건, 즐거운 일들과 타인에게 베푼 선행과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하여 오롯이 내가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 같다. 그게 무너지면 다른 사람도 상처 입히고 나도 상처 입는다는 생각이 든다.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
즐거움은 밖에서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을 거치면서
고마움과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부분적인 자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자기 일 때,
순간순간 생기와 탄력과
삶의 건강함이 배어 나온다.
여기 비로소
홀로 사는 즐거움이 움튼다.
마음의 주인이 돼라
내 마음을 내 뜻대로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한도인閑道人이 될 것이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모순과 갈등 속에서
부침하는 중생이다.
우리들이 화를 내고 속상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외부의 자극에서라기보다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데에 그 까닭이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런 마음을 돌이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사람들은 말한 것이다.
삶의 종점에서
살 만큼 살다가 삶의 종점에 다다랐을 때
내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원천적으로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맡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물질이든 명예든 본질적으로 차지일 수 없다.
내가 이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그림자처럼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이다.
진정으로 내 것이 있다면 내가 이곳을 떠난 뒤에도
전과 다름없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내가 평소 타인에게 나눈 친절과
따뜻한 마음씨로 쌓아 올린 덕행만이
시간과 장소의 벽을 넘어 오래도록
나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타인에게 베푼 것만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될 수 있다.
옛말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자신이 지은 업만 따를 뿐이다'라고 한 뜻이 여기에 있다.
간디는 일찍이 이와 같이 말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
나누는 일을 이다음으로 미루지 말라.
이다음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동생이 낸 기부금
에너지를 다 소진하여 지칠 땐, 창가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라도 들어보자. 그럼 자연은 참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늘은 읽고 싶은 책도, 보고 싶은 영화도, 듣고 싶은 강의도 없다. 청소도 하기 싫다. 그냥 가만히 백색소음에 나를 맡기도 싶다.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다. 그냥 가만히 밤하늘에 별만 바라보고 싶다.
푹 쉬다 보면 다시 에너지가 충전된다. 방전된 내 몸과 마음에는 가장 내추럴한 것들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