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 시를 썼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동시였는지 시조였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4학년 때 학교에서 시 쓰는 수업을 듣고서는 너무 재밌어서 집에서 노트에 혼자서 정말 여러 편의 시를 썼다. 그게 너무 마음에 들어서 색 사인펜으로 예쁘게 물결무늬도 그리고 테두리를 예쁘게 장식해서 내방 책꽂이에 꼭꼭 숨겨두었다. 친구가 놀러 와서 보고 싶어 했을 때 쑥스러워서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랬던 아이가 중학생 땐 학교를 마치면 도서관이나 만화책방 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 때도 서점과 만화책 방을 자주 다녔다. 대학생 때는 방송반 작가여서 매주 한 편의 방송 대본을 쓰고 음악을 선곡하는 게 내 일이었다. 되돌아보니 어느 정도 창조성의 씨앗이 움튼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 상담을 받다 상담사님의 말씀에 다양한 예술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하나가 시 쓰기였다.
내가 초창기에 쓴 시는 내 마음을 파도에게 위로받는 치유 시로 썼었다.
바다
찰싹!
파도가 내 마음을 때린다.
고작 것도 화를 내냐고.
철썩! 철썩!
파도가 내 마음을 두드린다.
이제 그만 풀어보라고.
쏴아아아! 쏴아아아!
파도가 내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리 와서 기대어 쉬라고.
갈매기 끼룩끼룩,
눈물을 머금고 날아간다.
은빛 울음을 머금고 날아간다.
친구에게 톡으로 메시지를 보내자 박수 이모티콘으로 화답해 주었지만, 그 친구는 어느 순간 멀어졌다.
서글프고 나를 많이 자책했지만, 이제 그런 생각은 안 하려고 한다. 시절인연처럼,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 그와 다르게 나와 꾸준히 함께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으니깐.
나의 창조적 자존감을 방해하는 적은 첫 번째, 바로 나의 글쓰기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이다. 위 친구처럼 또 다른 친구에게도 내가 쓴 글을 보여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친구의 반응은 예상밖이었다. 자신은 글을 잘 모른다며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땐 그냥 글쓰기에 관심 없나 보다 생각했지만, 그 후로도 여러 일들이 겹치며 멀어졌다. 살면서 내가 쓴 글을 책으로 선물해 줄 때도 화답하고 칭찬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묵묵부답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정여울 작가님이 말씀하신 게 인상 깊었다. 정여울 작가님도 말씀하시길 글 쓰는 사람에 대해 질투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하였다. 고도의 섬세한 내면 작업이라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창조적 자존감을 방해하는 두 번째 적은, 부모님이다. 며칠 전에도 슬며시 나 소설을 써보는 건 어떨까?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니 너는 왜 야망이 없어. 교감, 교장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거야?”라고 말씀하셔서 당황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교장, 교감은 관리직이라 나처럼 감수성 풍부하고 관계지향적인 사람은 맞지 않는다. 내가 아는 관리자들은 정치에 능하고 인맥이 풍부하며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면에서는 자신이 없다. 나는 감정에 진솔하고 세심하게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며 정치보다는 연구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 <창가의 토토>에 나오는 도모에 학교의 교장선생님 같은 분이라면 모를까? 일반 학교에서는 스트레스만 심해질 것 같은데 부모님이 야속했다.
사실 이만큼 글쓰기 하는 데까지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엄마는 툭하면 글쓰기 같은 건 집어 치우라고 했다. 내가 문예창작영재학급 강사로 일한다고 했을 때도 반대가 어마어마했다. 그러면서 ‘파울로 코엘료’의 전기 영화를 봤던 것을 보며 힘을 냈다. 파울로 코엘료도 아버지의 반대에 자해를 일삼을 정도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었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대작가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아주 소소하지만 인세도 받고 강사료도 많이 받아서 예전보다는 반대가 덜해진 것 같다. 파울로 코엘료처럼 성공해서 나도 ‘네가 작가여서 자랑스럽다’라는 말을 들어보고 싶다.
나의 창조적 자존감을 방해하는 세 번째 적은 바로 ‘시간 부족’이다. 아무래도 나는 본업이 있다 보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이 부족하다. 휴직했을 때는 하루에 1권씩 읽은 적도 있는데 직장에 다닐 때는 얇은 책이 아니고서야 1주일에 한 권 정도를 겨우 읽는다. 게다가 긴 호흡으로 쓰는 동화나 소설은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짤막짤막 쓰려면 흐름이 끊기기 마련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루에 5,000자 이상 쓰는 걸 꼭 지켰다고 하던데, 나에겐 아직 습관화할 수 있는 여력이 부족하다.
어쩌면 이 모든 게 핑계일지도 모른다. 문득 지금 쓰면서 든 생각이 나의 창조적 자존감을 방해하는 세 번째 적은 ‘시간 부족’이 아니라, ‘산만한 머릿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많다. 쓰고 싶은 이야기도 습작 카테고리에 여러 개를 적어두었다. 게다가 완벽주의 성향까지 있다 보니 시작하는데 오래 걸린다. 나를 파악하고 집중해서 몰입하는 시간을 늘리면 시간 부족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줄리아 캐머런의 <아티스트 웨이> 첫 주차, 첫째 날 글쓰기를 시작해 보았다. 책 띠지에는 500만 독자가 증명한 창조성 회복의 바이블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워낙 유명한 책이긴 하지만 간혹 비판적인 리뷰도 있어서 반신반의한 채 주문했지만, 일단 나로서는 첫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매우 만족하면서 읽었다. 그리고 이렇게 첫날 과제를 하고 나니깐, 더더욱 얼마나 멋진 책인지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몰랐다. 앞으로도<아티스트 웨이>와 창조성 회복의 여정을 함께하며 이 책이 증명한 사람들처럼, 나도 나만의 예술적, 창조적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다. 나의 창조성의 샘물이 화수분처럼 계속 샘솟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