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보다 믿음이 먼저인 사람

by 루비


“누나는 너무 의심을 안 해.”

동생에게 들은 이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는 사람을 만날 때 일단 무조건 믿고 보는 버릇이 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나에게 무언가를 건넸을 때 어떤 사람들은 불순한 의도가 있는지 의심하고 거절한다면, 나는 일단 나에게 주었을 땐 선한 의도가 있겠지 하고 받아두는 식이다.


이런 성향은 학교에서 2월 교실 대청소 기간이 되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올해 3학년을 맡게 되었을 때, 작년 3학년 선생님이 자신이 쓰던 물건을 주면서 “이거 필요할 테니 쓰세요.”라고 하고 주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날이 있지 않을까 하고 감사하게 받는다. 하지만 내가 비슷한 마음으로 다른 선생님께 그 반에 필요할 것 같아서 물건을 권하면, 단호하게 거절하는 경우도 많다. 그 물건이 얼마나 깨끗하고 멀쩡한가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필요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런 때면 내 선의가 왜곡된 느낌을 받는다.


결국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은 학습 자료실에 갖다 놓기도 한다. 2학년에 자주 쓰이는 시계 교구, 3학년에 쓰이는 곱셈구구 교구, 1학년에 쓰이는 한글 교구들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린다. 오늘 문득 나를 되돌아보며 곱씹었다. 이건 나의 문제인가? 어쩌면 너무 쉽게 다른 이의 선의를 의심 없이 받아 드는 내가 이상한 건 아닌가? 이런 식으로 나는 자주 나를 자책하면서 에너지가 소모되곤 한다. 그럴수록 몸과 마음이 지치고 겪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겪는다. 누군가가 나를 예민하다고 말한다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오늘 범죄 수사에 챗gpt상담 기록이 이용될 거라는 기사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종종 호기심에 상상으로 질문을 써 내려갈 때도 많다. 소설이 좋은 점이 내가 살아보지 않아도 되는 삶을 간접적으로 살 수 있듯이, 인터넷 검색이나 챗gpt상담도 영어의 if 가정법처럼 내가 상상하는 현실을 미리 예상해 보고 질문해 보고 답변을 듣고 앞으로의 상황을 연습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이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된다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물론 공익을 위한 활용이라면 범죄 수사 진척에 도움은 될 것 같긴 하지만, 개인의 맥락과 마음까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이와 같은 비슷한 일을 겪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불행하거나 상처 입은 사건을 오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몇 년 전 일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글을 쓰고 상담을 하곤 한다. 내가 스트레스가 심해지거나 힘들면 몇 년 전 일을 생생한 오늘 일처럼 인터넷에 상담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걸 그 당시 함께했던 선배교사들이 훔쳐보고 자신들에 대한 글이라고 오해하고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고 또다시 괴롭힌 경험이 있다. 나에겐 어떤 해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그걸 나를 대역죄인으로 몰아도 되는 일인 양 취급했다. 아마도 그건 자신들이 내 글을 훔쳐본 것도 떳떳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나로선 황당하고 억울하지만, 화가 나기도 하는 일이다.


실제로 <담임 선생님은 AI>라는 동화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있다. 기간제 담임교사의 인터넷 글을 컴퓨터 재능이 뛰어난 제자들이 훔쳐보고 선생님을 몰아내는 내용이다. 난 문득 훔쳐본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동화가 마냥 순수하게만 읽히지 않았다. 동시에 누군가의 글을 맥락 없이 들여다보고 판단하는 행위가 과연 정당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선함을 판단할 때 숨은 의도를 먼저 따져 묻는다. 겉으로 드러난 친절보다 그 속에 있을지 모를 계산을 의심한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생각한다면 누군가의 검색 기록이나 상담 내역을 훔쳐본다는 건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모두에게 옳은 행위라면 가능한 일이지만 결코 각자의 사정과 마음속 진짜 속마음까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는 일단 의심이 생길 땐 겉으로 드러난 표면이 선하다면 믿어주자는 쪽이다. 설사 내가 조금 손해를 볼지라도 말이다. 각자가 자기 이기심만 추구하고 자신의 안위가 지상 목표가 돼버리면 불행한 사회가 되어버리지만 조금씩 양보하면 선하고 따뜻한 세상이 될 수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


나도 기본적으로 여러 트라우마로 인해 의심이 많은 성격으로 굳어지긴 했지만, 조금씩 노력해보려고 한다. 맹자의 성선설처럼 누군가의 마음엔 다들 선함의 씨앗이 들어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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