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화일 뿐이야

파리에서 그와 나

by 루비

나는 다시 5년 전, 파리에서의 추억에 잠겼다. 에펠탑 앞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길을 찾고 있어요?”

뒤를 돌아보니 웬 호리호리한 인상의 남자가 서 있다.

“한국분이세요? 네. 루브르 박물관이 어느 쪽인지 몰라서요.”

“루브르 박물관은 지금 가도 못 들어가요. 제대로 보려면 한 달은 걸려요. 내일 보러 가고 오늘은 제가 이 주변을 소개해줄게요.”



P20160824_232234000_BF949EAE-20C7-4568-80B1-6B7620718674.JPG 세느강의 밤


나는 흔쾌히 수락하고 그와 함께 에펠탑 주변 세느강변을 거닐었다. 그는 그리스인과 결혼해 아테네에 살고 있는 누나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잠시 파리에 들렀다고 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있으며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어렸다. 서글서글한 인상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꿈꾸던 여행을 서른 살에 이루게 됐다며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온지는 이틀째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는 에펠탑에서 샹젤리제로 가는 거리, 루브르 박물관 방향으로 가는 거리, 앵발리드로 가는 길 등을 소개해주었다. 파리에는 아무리 못해도 일주일은 있어야 한다며 볼 것이 정말 많다며 그중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이 에펠탑 앞 공원이라고 했다.


“지금 몇 시죠?”

“8시 5분 전이요.”

“잠시 후 5분 뒤에 에펠탑이 반짝거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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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에펠탑


에펠탑은 매 시각 정각에 반짝거린다고 한다. 정말 그랬다.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는 에펠탑의 반짝이는 불빛이 8월의 크리스마스를 연상시켰다.


그는 대뜸 가방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가방에 와인을 들고 다녀요?”

나는 놀란 토끼눈을 하며 물었다.

“언제 어디서 추억을 만들지 모르니깐요.”


우리는 그렇게 와인을 같이 마셨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몇 모금밖에 마시진 못했지만, 달콤한 레드와인이 혼자 온 여행객의 흥을 돋웠다. 문득 영화 비포 선라이즈가 떠올랐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셀린과 제시의 사랑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그런 로맨스보단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들의 전우애에 가까웠다. 한참을 말없이 불어오는 바람만 쐬다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네, 만나서 반가웠어요.”


우리는 서로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만남 그 자체를 즐긴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너무나도 산뜻하게.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역시 영화는 영화일 뿐이야.







https://youtu.be/WdZxl2m4Sss 유키 구라모토의 '세느강의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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