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속의 헌정

창작 소설

by 루비


첫인상부터 별로였다. 꽉 끼는 짧은 셔츠, 노랗게 물들인 머리, 여자애들이나 할 법한 작은 링 귀걸이. 그런데 하필 그 애와 엠티에서 같은 조가 되었다. 옆에 가까이 서니 짙은 향수 냄새까지. 완전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다. 그래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직 안 지 얼마 안 된 우리는 대학 새내기이니깐, 최대한 서로에게 싱그러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랄까. 이런! 그 애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어색한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안녕! 같은 조네.”

“응, 그렇네. 반가워.”


어색한 침묵. 그때 조별 게임을 한다고 모두를 부르고 우리는 한자리에 모였다. 나와 그 아이가 우리 조의 첫 번째 주자로 나서게 됐다. 게임 방법은 남학생이 여학생을 안고 코너를 돌고 오는 것. 모든 조원이 다 돌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우리들에게 이런 게임은 소주를 여러 병 마시는 것보다 더 난감할 뿐인데... 대체 누가 기획한 거야?


“너 몸무게 몇이야?”


출발선에 대기하며 그 아이가 내게 물었다. 아니! 숙녀에게 몸무게를 묻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하지만 난 자신 있게, 하지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45kg!”


“와, 진짜 가볍다. 하긴, 넌 바람 불면 날아갈 것처럼 보였어.”


그 아이가 나를 안고 달린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이 나만 보면 새 다리라고 놀려댔었는데... 그럼에도 나는 운동장 조회시간에 한 번도 쓰러져본 적이 없다. 가녀린 여자아이들이 픽픽 쓰러져 실려 갈 때도 언제나 꿋꿋이 순국선열들에게 묵념을 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느새 코너를 다 돌고 제자리에 와있었다.


게임의 승패는 신경도 쓰지 못할 만큼 나는 얼이 빠져 있었다. 그날 엠티에 모인 우리과 새내기들은 밤새 진창이 되어 술을 마셔댔다. 여러 가지 술자리에서 하는 게임을 하며 윙크를 하다가 바보라고 놀리다가 누군가의 호기로운 무용담을 들어주다가. 그렇게 몇 잔 마시다가 나는 쓰러져 잠자리에 들었다. 주변 사람들의 후문에 의하면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혼자 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숙취와 피로로 노곤한 몸을 첫 엠티의 강렬한 기억으로 대체시킬 라면을 끓여먹었다. 수험생 시절, 공부하다 출출하면 늘 찾아 끓여먹었던 라면인데, 이때 먹은 라면은 왜 이리도 쫄깃쫄깃하고 얼큰한지... 피곤에 찌든 웃음을 지면서도 미쉐린 레스토랑에서 먹는 라면 맛이 이런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들떠 있었다. 대게며 쪽파며 표고버섯이며 계란이며 그 어느 것 하나 들어있지 않은 그저 물과 수프와 면발이 전부였을 뿐인데도...


후드득 후두둑. 이런, 젠장!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 소나기가 온다는 말은 있었지만, 유스호스텔을 떠나려던 찰나에 비가 내리다니...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체크아웃 시간이 있어서 우리는 짐을 싸서 나와야만 했다. 주섬주섬 챙기고 문을 나서는데 그 아이와 마주쳤다.


“어제 잘 잤어?”


“어. 너도?”


“이거 읽어봐.”


그 아이가 나에게 남자 손 같지 않은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메모를 건네줬다. 그 순간 현관에서는 빗소리가 경쾌하고 부드럽게 슈만의 피아노곡 ‘헌정’을 연주하는 것만 같았다. 막내 고모의 결혼식에서 처음 연주를 듣고선 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주해줘야겠다고 생각했던 피아노곡. 그 후로 간간히 연습해왔던 그 곡이 왜 지금 빗소리가 되어 내 마음에 요동치는 거지? 그 아이는 내게 쪽지를 건네주고 멋쩍은 듯이 짐을 싸서 뒤돌아 가버렸다. 무슨 내용이 적힌 걸까. 나는 조심히 메모를 열어 읽어봤다.


『너 쫌 귀엽다. 나랑 친하게 지내.』


그리고 환하게 웃는 이모티콘까지. 그 쪽지를 본 순간 어렴풋이 내 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싫어한 게 아니었구나. 사실 좋아하고 있었구나. 나는 가방에서 서둘러 펜을 꺼냈다. 그리고 메모를 뒤집어 서툴게 답장을 썼다.


『우리 소나기 그칠 때까지 같이 기다릴래?』


분홍색 펜으로 하트까지 그려 넣었다. 어느새 나는 클라라가 되었고, 그는 나의 슈만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