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중학교 3학년을 마무리하던 시절, 평소 패션잡지를 즐겨보던 나는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 당시 젊은 세대들이 해외 펜팔을 즐겨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학생들의 인터뷰도 실려 있었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은 나는 곧장 잡지에 적힌 주소로 들어가 내 프로필을 영어로 적었다.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 친구들의 프로필도 살펴본 후, 이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난 비슷한 또래의 미국 소녀와 펜팔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소녀의 이름은 Hayley였다. Hayley와 편지를 주고받게 된 것은 꽤나 행운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 가치관, 성격 등이 꽤나 비슷했다. 이를 테면, ‘남자애들은 유치해’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비슷해서 공감이 갔고, “안네의 일기 책 읽어봤어?”라고 묻는 내 질문에 Haeley의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서 당연히 읽어봤다는 대답에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Hayle는 나처럼 중국어를 배웠고, 옆집에 사는 한국인 친구 덕택에 한국말도 배우기 시작했다. Hayley와 그 당시 이라크 전쟁에 대해 이야기 나눈 것은 서로에 대한 깊은 공감과 연대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지금도 내 방 한쪽 구석 편지함에는 Hayley와 교환한 편지들이 한가득이다. 나는 이 편지들을 파파고 번역기와 내 서툰 솜씨로 번역을 완료해서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현재 밀리의 서재에서도 볼 수 있고 내 브런치 매거진 <세계의 친구들>에서도 볼 수 있다.) 벌써 20여 년 전이라 요즘 친구들은 어떤 식으로 해외 친구를 사귀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앱을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내 추측이다. 하지만, 나는 손글씨로 편지를 적어 내려 갔던 이때의 추억이 아련하고 감사하다. 우리의 인연은 내가 지방으로 대학을 가게 되면서 끊겼다. 이십 대 내내 방황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내 마음 한 공간에서 Hayley가 멀어진 건, 여전히 지독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언젠가 직접 만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 외에도 대만, 이탈리아, 프랑스, 핀란드 친구들과는 이메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직장에서 공유 컴퓨터를 사용하고 로그아웃을 깜박하고 못했을 때, 직장 동료가 스팸메일인 줄 알고 다 삭제했다고 뒤늦게 사과를 해와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본인 이메일인 줄 알았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그 이유가 잘 납득이 가질 않았다. 나는 내 해외 펜팔 메일들을 영어 이름과 이모티콘을 사용하여 폴더별로 분류해놨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려서 난 망연자실했다. 물론 로그아웃을 안 한 내 불찰이 제일 크다.
어찌 되었든, 요즘에는 사회가 풍족해지고 해외교류가 활발해서 외국인 친구 사귀기도 쉬운 세상이다. 뉴욕의 극작가와 영국의 서점 주인이 20여 년간 책을 매개로 문학적 편지를 나누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84번가의 연인>이라는 영화도 있다.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요즘처럼 속도를 중시하는 세상에 편지를 교환하는 행위는 참으로 서정적이고 낭만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해외 펜팔을 해본다면, 단조로운 오후, 상큼한 레몬홍차를 마시는 것 같은 즐거운 기분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