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피아노 치는 소녀

2. 서울 한양 고등학교에 입학하다

by 루비

그날 아침은 연우가 고등학교 예비 소집일에 가는 날이었다. 약간의 쌀쌀한 날씨가 연우의 옷깃을 더욱 여미게 했다. 이제 막 봄이 오는 것 같으면서도 아직은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그런 날씨였다. 연우의 마음도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이심전심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들이 가득했지만, 새로운 곳은 무척 낯설기만 했다. 그럼에도 혹시나 시골 마을에서처럼 소중한 친구들을 새로 사귈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연우가 언젠가 봤던 순정만화 속 그런 학창 시절을 꿈꿨다. 학교는 한 학년당 18개의 반으로 이루어진 큰 규모의 학교였다. 1학년 신입생들이 줄을 서서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고등학생 시절은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예요. 특히 이 입학 전 한 달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을 좌우하죠. 단순히 노는 시간으로 보내기보다 한자 공부도 하고 관련 문학책도 읽으며 소중한 시간으로 보내도록 하세요.”


연우는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 기울여 들었다. 예비 고등학생으로서 선생님들이 내주는 과제가 좋았다. 자신이 성장할 기회가 생긴 것 같아 뿌듯했기 때문이다.


“저기…. 내가 딴생각 하느라 못 들었는데 선생님이 뭐라고 했지?”

귀마개를 한, 약간은 껄렁해 보이는 여학생이 고개를 가까이하며 물어왔다.

“아, 한자 공부와 문학책을 많이 읽으라고...”

“아, 고마워. 나는 세은이라고 해.”

“아, 나는 연우.”

“여기 출신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왔어?”

“아, 나는….”

그때 선생님이 연우와 세은이를 향해 호명하셨다.

“거기 뭐 합니까?”

“아, 연우라고 했지? 우리 같은 반 되면 좋겠다. 그럼 3월에 봐.”

“어….”


당황한 세은이는 황급히 말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연우도 한숨을 내쉬며 그날 들은 내용을 메모한 후였다. 어쩐지 연우는 세은이라는 아이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같은 반이 됐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세은이와 나란히 1학년 1반 1번과 2번이 된 것이다. 담임 선생님께서 강연우, 김세은이라고 불렀을 때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네라고 대답한 쪽을 바라봤다. 분명 예비소집일 날 만난 세은, 그 얼굴이 맞았다. 선생님께서는 3월 한 달간은 번호 순서대로 앉겠다고 했다. 그래서 둘은 나란히 짝이 되었다.


“와, 어떻게 이런 인연이 있지?”

세은이가 말했다.

“정말 신기하다. 같은 반, 앞뒤 번호라니….”

‘”우리 친하게 지내자.”

“응응.”


그날부터 연우와 세은이는 단짝처럼 지냈다.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하교 시간에도 늘 같이 다녔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빠르게 친해졌다. 연우는 세은이에게 부모님이 이혼한 사실도 숨기지 않고 다 털어놓았다. 그런 연우를 세은이는 짐짓 어른스럽게 위로해 주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빠, 엄마, 나로 이루어진 가족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함께 사는 대가족도 있고, 또는 너처럼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한쪽 하고만 사는 한부모 가정도 있고. 그게 뭐 대수야? 내가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면 그만이지. 혹시라도 상처받거나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털어놓아. 내가 다 들어줄게.”


연우는 그런 세은이가 무척 고마웠다. 언뜻 세은이에게서 호영이의 모습을 봤다. 세은이와 하굣길에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서는 곧장 호영이에게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이메일에는 새로 사귄 세은이에 대한 자랑으로 가득했다. 그러면 한 일주일쯤 지나서 호영이에게 답장이 왔다. 세은이는 조금 더 답장을 빨리할 수 없냐고 재촉했지만, 호영이는 바쁜 일이 있었다며 핑계를 대곤 했다. 서운하긴 했지만, 연우는 새로 사귄 세은이 덕분에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즐거운 날들만 펼쳐질 것 같았다. 두 마리, 아니 서너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었다. 친구도, 공부도, 미래의 꿈도…. 그리고 가능하다면, 사랑도….


하지만 생각보다 그 기대는 빠르게 무너졌다. 학교의 친구들은 동반자이기보다 경쟁자에 가까웠다. 친한 듯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경쟁심리, 라이벌 의식이 고개를 들었다. 그건 연우와 세은이 사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우는 이따금 세은이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세은이는 왜 필기 노트를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지, 주말에 함께 놀러 나가면 이따금 자신이 시골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듯한 세은이의 태도에 상처를 받았고, 자신이 다른 친구와 가까워지는 모습이 보일라치면 어느샌가 다가와서 둘 사이를 은근히 멀어지게 만들곤 하는 세은이였다. 세은이는 눈에 띄지 않게 상처 주는 말을 잘하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연우야, 옷은 이렇게 입는 게 아니야….”

“뭐?”

“너 중학교 가정 시간에 뭘 배웠니? 옷 종류별로 색깔별로 정리하고 필요한 것만 사야지. 너는 완전 하나도 제대로 못 배운 티가 난다고….”

“나 딱 필요한 것만 사는데 왜 말을 그렇게 해.”

“네가? 아닌 것 같은데….”


그날은 연우가 세은이와 또 다른 친구 지은이와 만나서 피자를 먹으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세은이는 연우를 보자마자 옷을 잘 못 사 입는다며 지적을 하며 연우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연우는 그런 세은이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친구라고 믿는 세은이가 설마 자신이 잘못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은 아니겠거니 하며 자신을 되돌아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연우와 세은이와 지은이는 셋이서 함께 시내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골목길을 걸으며 액세서리 숍에 들어가 예쁜 목걸이며 귀걸이도 구경하고 옷가게에 들러 서로에게 어울리는 봄맞이 옷도 골라주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알게 모르게 자신은 세은이와 지은이 사이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중학생 시절 친구들은 이러지 않았는데…. 호영이, 진호, 수진이는 이러지 않았는데…. 자꾸만 중학교 친구들이 그리워졌다. 그 아이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참 행복했었는데 하고 자꾸만 그리움에 빠지는 연우였다.


어느 날 밤, 자기 방 침대에서 잠들기 직전 연우는 갑자기 자기가 너무 낯선 곳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 시절 국어 교과 시간에 배웠던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라는 시를 떠올렸다.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마치 자신이 겁도 없이 바다로 뛰어든 흰 나비가 된 기분이었다. 서울이라는 공간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너무나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 사방은 온통 적뿐인 공간…. 너무나 지쳐버린 자신의 두 날개…. 연우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연우는 자주 울면서 잠이 들었고, 틈날 때마다 호영이에게 메일을 보내보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연우야!!”

학교에 가니 세은이가 다급하게 불렀다.

“어, 무슨 일이야?”

“우리 같이 동아리에 들지 않을래? 동아리 신입생 모집한대….”

“아, 동아리…. 나는 동아리에 들 생각이 없는데….”

“왜? 동아리 하면 좋잖아. 나 방송반에 들고 싶은데 너도 같이 들어가지 않을래?”

“음…. 무슨 무슨 동아리가 있어? 나도 좀 알아보고 싶어.”

“복도에 나가봐. 벽보가 많이 붙어있어. 방송반에 관심 가면 나한테도 얘기해 줘.”

“응.”


연우는 고민이 되었다. 자신은 공부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면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또한, 자신은 동아리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보다 학급 친구들과 더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세은이는 방송반 동아리에 들고 싶어 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세은이와 함께 방송반에 드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그럼 지금은 가끔씩 자기를 밀어내는 세은이지만, 더 가까워지고 친해질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송반 동아리 부원 모집 벽보를 봤다. '아나운서 0명, 제작부 0명, 기술부 0명 모집. 신입생 대 환영'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제작부는 방송 원고를 쓰는 일을 한다고 하였다. 연우는 원고를 쓴다는 말에 관심이 확 쏠렸다. 중학생 때도 종종 교내 글쓰기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곤 했던 연우였다. 아나운서처럼 방송을 하는 것은 좀 부끄럽지만 글을 쓰는 것이라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힘들었던 3월이라고 느꼈던 마음에, 다시 초록빛 희망의 새순이 돋아다는 것만 같았다.


“좋아. 세은아. 우리 같이 방송반에 들어가자.”


연우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세은이에게 말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