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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비 Jun 06. 2024

행복한 결혼생활의 뒷받침

희곡 <인형의 집>을 읽고


예전에 어디선가 읽고 현명한 조언이 마음에 콕 와닿아서 스크랩해 두었던 글이 있다. 



꿈을 이뤄줄 수 있는 남편감들   


1. 우선 경제력은 기본이다. 언제나 후원이라는 것은 돈을 의미하지 않던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은 대개 돈을 주시어서 맘고생 안 하게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라는 뜻이다. 


2. 두 번째, 자신의 부모님을 잘 길들인 남자여야 한다. 너무 순종적으로 자라서 부모님 말이라고는 거역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멀리하는 것이 좋겠다. 꿈 이루는 것과 상관없이 남편감을 고르는 여자라도 이런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아무리 남편이 당신의 꿈을 이해해 준다고 해도, 그 꿈을 이해 못 하는 시부모님이 주는 스트레스를 저지할 만한 영향력이 없다면 너무 힘들어진다. 뭔가 일을 저질러 보기도 전에 인간관계에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다. 


3. 세 번째, 성취지향적인 남자이어야 한다. 남자들의 외조는 여자들의 내조와는 다르다. 자기 자신이 성취욕이 없는 사람은 아내가 성공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 주지 못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자꾸 주저앉히려고 든다. 물론 성취지향적이면서 가부장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을 내조하기만을 바랄 것이지만 말이다. 


4. 네 번째, 부지런한 남자만이 진정한 후원자가 될 수 있다. 아무리 다른 미덕이 뛰어나도 가사분담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남자라면 함께 발전하는 동반자가 되기 어렵다. 혼자서 전업으로 해도 잘하기 힘든 게 집안일이다. 자기 일 하면서 집안 살림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여자는 드물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혹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매일 가사 도우미 아줌마를 붙여 줄 수 있는 남자라면 모를까. 


5. 다섯째, 가장 중요하면서도 당연한 것이지만 일하는 아내를 뒷받침해 줄 용의가 있는 남자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아직도 많은 남자들은 퇴근 후 완벽한 저녁상을 차려 놓고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를 원한다. 맞벌이를 원한다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일하는 아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돈 버는 아내'를 원하는 것이며, 여건만 닿는다면 아내가 주부로 남기를 원하는 남자들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일함으로써 행복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해 주는 사람이 남편이 된다면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은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같은 반 학생의 꿈이 '현모양처'라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요즘도 결혼해서 남편 덕에 집에서 가정 주부로 살기를 원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삶의 다양성과 가치관은 존중하지만 사실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뭐 하러 고등교육을 받고 대학을 가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살림이란 것도 잘하려면 끝이 없고 해도 해도 티가 안나는 것이지만, 나라면 그렇게 집안에서 가정만 돌본다면 우울증에 걸려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생각을 더 확고하게 만든 건,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었다. 여자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남자에게 비굴하게 굴종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수필집이다. 그리고 오늘, 한 권의 책을 더 알게 되었다. 바로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제목부터가 주인공 여자인 '노라'를 인형으로 취급하는 가부장적인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노라'는 한 명의 인격체로서 존중받은 것이 아니라 '종달새'나 '다람쥐'로 불리며 과자 먹는 것까지 통제받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기하는 남편의 소유물이자 인형일 뿐이었던 것이다.


노라는 헬메르와의 8년 간의 결혼 생활이 전부 허상이었고 가짜였다는 사실을 위기에 처하고서야 깨닫는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아버지와 남편을 위해 법을 어겨가면서 저지른 일을, 남편은 사랑으로 감싸주고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며 덮어주고 용서해줄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남편은 진실을 아는 순간, 노라를 아이들을 키울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경박한 여자 때문에 자신은 망했다고 맹비난한다. 후에 위기에서 벗어날 편지가 그들에게 도착하지만 이미 노라는 남편인 헬메르의 진심을 마주했고 그들의 결혼생활은 허울뿐인 껍데기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였다. 그렇게 가정은 깨어지고 말았다. 


작품 해설에서 역자는 이 희곡이 처음 초연된 노르웨이의 1879년 시대상이 이런 가부장적인 사회였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도 한 때는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결혼 제도가 성행하던 시기가 있기에 공감하는 분들도 많을 것 같다. 더구나 요새는 사랑이나 존중하는 마음보다 조건적인 거래를 통한 매매혼 같은 결혼이 많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100년도 더 전에 지어진 노르웨이의 이 작품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결혼이란, 상호 존중과 사랑을 배려로 이루어져야 진실한 행복을 일구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으로 결혼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 100년도 안 된 근대의 산물이지만, 가식적인 사랑, 껍데기 같은 사랑이 아니라, 정말로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만나야 행복한 결혼 생활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라가 헬메르를 박차고 법과 종교의 말씀에도 의문을 갖고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난 것처럼, 스스로 묻고 답하고 사유하는 능력을 기를 때, 자신과 비슷한, 바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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