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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zzy Jul 13. 2020

날개와 맞바꾼 그 무언가들.

Everywhere but nowhere, 외항사 승무원의 삶.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포기하고 인간의 다리를 얻었던 그 어느 동화 속 이야기가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그 옛날 옛적 동화에서조차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단순한 이치를 논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메커니즘을 받아들이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일까.
   고행 끝에 날개를 얻었다. 인어공주가 다리를 원했던 것만큼이나 간절했다. 목소리를 내어줄 만큼 간절했던 그녀였다. 나는 무엇을 내놓았을까. 다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신 앞에 제물을 바치듯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비루한 것들을 내려놓고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가라고 호소했었다. 그저 내게 날개를 달라고. 그거면 된다고. 더는 욕심내지 않겠다고.
   날개는 자유의 상징이다. 물리적으로 혼자서도 전 세계 어디든 비교적 쉽게 갈 수 있는 일차적인 자유를 포함해, 혼자 살며 내 마음대로 내 식대로 생활하는 부가적인 자유, 시간관념이 남달라 진 생활 패턴에서 비롯한, 내가 비행에서 돌아온 시간이 곧 자는 시간이고 내가 일어난 시간이 곧 아침식사 시간인, 기존의 시간 개념을 무시하고 생활할 수 있는 자유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짜릿했던 자유는, 궁극적으로 그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그저 내 자신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외항사 승무원이 되어 날개를, 그리고 그 전의 내 삶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자유를 모두 얻었고, 주변인들이 으레 비유하듯,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마냥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눈만 뜨면 다른 나라, 다른 도시였기에, 비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누군가가 지금 어느 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바로 튀어나오지 않는 경우도 허다할 정도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곳이 내 방인지, 혹은 어느 나라의 호텔인지, 심지어는 사실 지금이 ‘아침’이기는 한 건지를 생각해봐야 할 만큼 시차와 대륙을 넘나들었고, 그렇게 나는 말 그대로 ‘어디에든’ 존재하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은, 어쩌면 나는 사실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전 세계 모든 곳에 속해 있는 듯하다가도, 동시에 그 어디에도 진정으로 속해 있지 않다. 이는 승무원, 특히나 외국에 베이스를 두고 있는 외항사 승무원의 삶의 형태를 단 한 줄로 정의한 것이 아닐까. Everywhere but nowhere.



   발길 닿는 곳마다 만들어지는 수많은 인연들, 각종 나라에서 온 갖가지 다른 인종의 그들. 키도, 피부색도, 목소리도, 사용하는 언어도, 성격도, 사고방식도 모두 다른 그들이지만 신기하게 어느 시점에서 나와 통하는 바가 있었는지, 몇몇 순간순간들을 공유하고는 했다. ‘내가 사랑했던 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 하던 그 옛날 가요의 가사처럼, 그들 모두가 내 것인 것만 같았다. 그들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모두에게 적어도 내 마음의 한 조각씩은 내주었었다. 마음 귀퉁이 한 조각, 혹은 두 조각, 누군가에게는 조금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음 한 덩이, 그 어떤 누군가에게는 홀랑 다 내어주었는데, 여전히 나는 그 누구에게도 속해있지 않다. 문득 또 떠오르는 다른 노래 가사가 있다. ‘Everything means nothing’. 노래 가사 쓴 사람들은 다들 이미 내가 겪은 것을 다 겪어보았나 보다. 참 많은 밤을, 취해서는 안쓰럽게도 하필 당시 옆에 있던 애꿎은 사람들에게 내 자신이 사막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하소연을 했었다. 텅 비었다고.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겠다고. 황폐해져서 이제는 모래바람만 불어오는데 무슨 수로 다시 꽃을 피우겠냐며 말이다. 그들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는, 뻔하지만 사실 진리일지도 모르는 말들을 건네 왔고, 그렇게 그 밤만 어찌어찌 잘 넘기면 어김없이 곧 다음 비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조심히 손에 꼭 쥐어 주었던 내 마음 조각을 누군가 내동댕이쳐도, 망가뜨리고는 훌쩍 두고 가도, 머뭇거리며 내게 다시 돌려주고 가도, 그렇게 그 모든 것이 흔들리고, 변질되고, 부서지고, 사라지며 내 세상을 흔들어보려 노력해도 내 날개는 굳건했다. 나는 다시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표정으로 비행을 갔다. 가는 길에서부터 웃기는 사실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울거나 찡그린 것도 아니었다. 비행기라는 무대에 서는 순간부터는 슬픔이 비치는 웃음일지언정 웃었다. 억지로라도 웃고 있다 보면 어느새 진짜 웃고 있더라. 내 날개는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때로 힘든 비행도 있고, 어쩌다 안 맞는 동료도 있을지언정 내 날개는 어디 가지 않고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일하다 보면 어느새 캡틴은 착륙을 위한 안내방송을 한다. ‘Ladies and gentlemen~’ 하기가 무섭게 나는 갤리(비행기의 주방)에서 캡틴의 안내방송에 맞춰 어깨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어떤 신나는 클럽에서 나오는 음악도 그만큼 내 흥을 북돋울 수 있을까? 동료들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하다 이내 내 움직임에 합류한다. 이제 캐빈 시큐어(랜딩 준비)만 마치면 착륙이다!! 긴 비행 끝에 바닥으로 내려가 있던 에너지 레벨이 순식간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비행을 가기 전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이미 생각지도 않은지 오래이다. 곧 착륙하게 될 도시에 대한 생각만으로 마음이 부풀어올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또 다른 도시 한가운데에 와 있었다. 태어나 자란 곳, 그리고 몇 시간 전까지 있던 곳과는 판이하게 다른 공기가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때로는 훅- 하고 급작스레 덮쳐오는 뜨거운 바람이, 때로는 생각보다 훨씬 쌀쌀하지만 상쾌한 바람이 그 도시의 첫인상이다.
   아, 날개 대신 내놓은 것이 그 무엇이 되었듯, 갑자기 하나도 아깝지가 않다.
   사랑이든, 정착하는 삶과 그에 따른 안정감과 소속감이든, 혹은 다소 간지럽지만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그놈의 ‘평생 내 편이 되어줄 그 누군가’이든, ‘그냥 킵하세요~’ 하며 쿨하게 웃으며 낯선 도시에 발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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