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항공업계를 강타했어도, 나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터널이 막 시작되었던 4월은 가장 어두웠던 시간이었다. 혼돈의 틈에서도 이 곳에 남아 어떻게든 비행을 계속하겠다는 내 결정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어둠 탓에 바로 코 앞조차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렇게나 지켜내려 했던 ‘비행 생활’은 비행 자체가 주어지지 않아서 일차적으로 좌절되었다. 4월 초에 단 하나의 비행이 주어진 이후로 한 달 내내 비행이 없었다. 매년 주어지는 휴가가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닌 그때 강제적으로 주어져 다 소진하게끔 되었기 때문이었다. 슈퍼마켓과 약국 외에는 문을 연 곳도 없었고, 심지어 한 차에 2명 이상이 탈 수도 없었을 만큼 규제가 심했던 락다운의 초반, 집을 나갈 수도 없는 강제 휴가는 숨이 막혀올 따름이었다. 빛의 작은 힌트조차 찾을 수 없던 어둠은 그렇게 내 믿음을 종종 흔들어보려 했지만, 꼭 물리적인 빛이 없다고 해서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이미 비슷한 터널을 지나가 본 적이 있다면 말이다. 다가올 미래를 100% 알 수는 없다지만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기 마련이니까.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서 말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현명해진다고 하나보다. 물론 물리적 숫자만 더해지는 것이 아닌, 그에 걸맞은 경험치가 쌓이는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 주변의 그 누가 어떤 다른 결정을 하든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내게는 지켜내야 하는 것들이 많았고, 지켜내기 위해서는 터널에 혼자 남겨질지언정 그저 굳건히 서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십 대 중후반에 시작된 나의 터널은 너무 캄캄하고 깊었어서 그 터널이 끝날 거라는 확신조차 없었다. 엄마는 자주 내게 ‘아무리 긴 터널에도 끝은 있다’고 했었지만 그 말을 믿기에 그 터널은 너무 길고도 길어 도저히 끝이 있다고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단순히 길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터널을 지나는 길은 험난했다. 그 시작부터가 힘겨웠기에 터널을 지나며 그보다 더 힘겨운 장애물이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그저 점차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만을 가지고 한 걸음씩 나아가야 했다. 하지만 숨을 좀 고를만하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매번 난이도가 높아, ‘아 심지어 이제까지가 최악이 아니었구나’ 하고 매번 나를 놀라게 할 뿐이었다. 짐을 잔뜩 짊어진 노새가 사막을 횡단하듯 그저 꾸역꾸역 힘겨운 한 걸음씩을 옮겨 나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선택지가 없었고, 그렇게 5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자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 아무리 긴 터널에도 끝은 있다는 말을 믿지 않을 길은 없었다. 그 터널이 5년짜리이듯, 10년짜리이듯, 끝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었다. 다만 그 끝까지 걸어 나가지 않으면 그 빛을 만날 수 없을 따름이었다. 넘어져서 며칠간 쓰러져 있었든, 부상을 당해 잠시 쉬어가듯, 지쳐서 걸음걸이가 느렸든, 나는 아무튼 끝까지 걸어 나갔었다.
그 길고 길었던 터널을 지나 드디어 빛이 가득한 세상에 나왔을 때는 아무리 오랜 시간 햇빛 아래에 머물러도 부족하고 또 부족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듯한 기분으로 매일같이 광합성을 했지만, 그간 어둠이 꽉 차게 자리했던 그 긴 시간을 다 보상받으려면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지구는 둥글고 계속 도니까 빛이 있는 방향만 따라서 나도 돌면 어둠을 영영 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끔 어둠이 찾아오려 하면 잽싸게 뛰어 빛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빛만, 여름만, 아름다움만 좇아다닌지 4년 가까이 되었을 때, 나는 터널이 무엇이었는지, 어둠이 무엇인지에 대해 점차 잊어가는 듯했다.
처음 락다운이 시작되었던 4월 초, 단 하나의 비행을 마친 후 한 달 내내 이어지는 쉬는 날에 길을 잃은 듯했다. 비행을 시작한 이래로, 땅보다는 하늘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삶을 시작한 이래로 그렇게 오랫동안 땅에 있어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작은 터널의 시작이었다. 어색하다 못해 스스로가 쓸모없게 느껴질 때도 있을 만큼 힘겨운 시간의 시작이었다. 그런 상황을 겪어본 지가 오래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금세 나는 그에 맞는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건강한 음식을 내 손으로 만들어 먹고, 비행을 시작한 이래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았던 수면 패턴을 형성하고, 매일같이 요가를 하며 한껏 땀을 흘리고 그간 밀려왔던 이야기를 글로 써내려 가면서 말이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방식도, 그간 겪어온 일의 종류와 무게도 다르기에 동일한 일에 대해서도 견뎌낼 수 있는 한계치가 다를 것이다. 이미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고도 컴컴했던 터널을 지나왔던 나에게 이 정도는 잘 견뎌낼 수 있는 일로 여겨졌다. 그렇게 내가 한 결정은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이기도 했고, 동시에 최선이기도 했으며,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일하게 내게 주어진 선택이기도 했다. 나는 또 견뎌내야만 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터널은 일방통행 길이었다. 시작점으로부터 한 방향으로만 길이 나 있고, 그 끝에는 빛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전 세계적인 이 역병은 단순히 ‘외출할 수 없음’, ‘친구들과 만나 어울릴 수 없음’, ‘여행 다닐 수 없음’의 문제를 떠나 우리의 생명과 생계를 위협해 오기 시작했다. 당장 내 비행에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와 시설에 격리를 당하고, 눈물이 쏟아질 만큼 아프고 서러웠던 스왑 테스트를 두 번 받고, 내가 최전방에서 위험에 노출되었음을 인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닐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아니었지만, 코로나라는 실체에 그렇게나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만으로도 매일매일의 비행은 전쟁터였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감싼 방호복을 입고, 실제로 몇몇 크루들이 이렇게 일하다 비행 중 기절했다는 소식을 들어가며 일하면서도 그래도 일할 수 있는 비행이 있음에 감사했다. 가뭄에 콩 나듯 한 달에 한두 개 주어지는 비행이었지만, 이제는 그 비행이 무엇이든, 어디를 가는 비행이든, 그저 유니폼을 입고 집을 나설 일이 생겼다는 것 자체로 감사할 마음이었을 만큼 우리는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세계 여기저기서 항공사가 파산했다는 소식을 접해야 했고,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같은 중동의 옆동네 다른 항공사들이 무더기로 크루를 해고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물이 턱까지 차오른 기분이었다. 그때부터는 과연 대용량 세제를 사도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해야 했다. 집에 늘 있다 보니 요리를 해 먹기 위해 먹을 것을 쟁여두면서도, 갑작스럽게 이 곳을 떠나야 한다면 낭비일 것이 분명하다는 마음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우려를 영영 외면할 길은 없었다. 일 년에 한 번 주어지는 리커런트 시험, 그리고 3개월에 한 번씩 주어지는 평가 비행에서는 혹시라도 작은 실수라도 할까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예전 같으면 ‘작은 실수’에 그칠 일이, 이제는 그 어떤 큰 일을 불러일으킬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그리고 비행에서 동료들과 하는 이야기 주제 중 ‘구조조정’ 혹은 ‘해고’가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더욱 숨이 막히게 만들었지만, 귀를 막고, 그에 대한 대화를 회피한다고 해서 그 현실마저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현실을 직시하고, 주변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대비하는 편이 현실적일 테니 말이다.
예상했던 바였고,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늦게 일어나기는 했지만, 결국 월급이 삭감되었고, 주변에서 수많은 동료들이 직장을 잃었다. 그 소용돌이 안에서 ‘나는 아닐 거다’라는 믿음은 한 번의 발길질에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모래성 같았다. 그래도 지켜내야만 했다. 태풍이 불어오고 발길질을 해대려는 시도가 여기저기서 있어왔지만 나는 그래도 내 모래성을 지켜내야만 했다. 묵묵히 내 터널을 지나려면 강해져야만 했다. 지나친 스트레스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렇게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을까 암담했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이 터널을 나갈 수 있는 것은 결국 나였다. 그 다른 누구도 아닌, 각자가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버텨내고, 걸어 나가야 할 뿐이었다.
8월, 한 달치 로스터를 받고 보니, 그 터널은 아무리 길어도 4개월이었다. 락다운이 시작된 이후로 4월부터는 회사에서는 2주치씩만 로스터를 내놓기 시작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당장 내일 그 어느 나라의 국경이 닫힐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한 달치의 스케줄을 다 내놓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당장 오늘의 비행이 충분한 손님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그 나라의 국경 사정이 바뀌었다는 이유 등으로 취소되거나 변경되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2주 단위로 내놓는 일정마저 무모하리만큼 머나먼 미래를 약속하는 듯했다. 당장 오늘의, 그리고 내일의 비행이, 아니 오늘의 내 일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2주 후에 어딘가로의 비행이 있다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제는 최악 중 최악은 지났나 보다. 7월 중순, 드디어 4개월 만에 다음 달의 비행 일정 리포트가 업로드되었다. 원래는 매달 다음 달의 비행 일정이 이렇게 미리 발표가 되고, 그것을 참고해 원하는 비행을 신청할 수도 있는 시스템이었지만, 비행 스케줄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드물게 존재했던 지난 4개월간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8월부터는 늘어날 취항지를 보며 어찌나 마음이 부풀어 올랐는지 모르겠다. 100페이지가 넘어가는 그 리포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무려 다 살펴보았을 정도니 말이다. 새로운 장소에 목이 말라 있었던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의 비행을 신청했다. 애석하게도 100페이지가 넘어가는 비행 운항 스케줄의 취항지에서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다가올 8월에는 한 달치의 완성된 스케줄을 받았다. 내가 신청했던 리스본 비행을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이 역시 그 언제 취소되거나 변경될지 모르는 바람 앞의 등불이나, 그래도 이제 전보다는 조금 더 먼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신호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여전히 예전 같기는 어렵고, 항공업계가 예전처럼 정상화되려면 2023년은 되어야 한다는 전망이다. 2023년이라니, 너무 비관적인 것 아닌가! 싶다가도, 매번 꽉꽉 들어차다 못해 오버부킹이었던 미국 비행 마저 텅텅 빈 채로 운항했던 며칠 전의 내 비행을 생각해보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노동강도에 걸맞기는 하니 억울하다기보다는 합리적이라 해야 할지 모르나, 아무튼 우리의 월급은 삭감되었고, 오늘 입금된 반토막 난 월급을 보니 헛웃음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을 본다. 이제는 앞으로 한 달만큼의 미래를 공식적으로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에 희망을 논한다. 최악은 이미 지나갔고, 이제는 좋은 사인만이 보일 뿐이니 말이다. 영원할 것 같이 막막하고 깜깜했던 그 터널의 가장 어두운 구간은 기껏해야 4개월이었다. 아직도 우리는 터널을 지나고 있기는 하나, 저 멀리 출구가 보이는 이상, 그 출구의 빛이 저 앞 어딘가에 보이는 이상 발걸음은 한결 가벼울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손님으로 꽉꽉 들어차 단 한자리도 비지 않은 채 비행기를 띄우는 일이 흔하게 될 때, 감히 비행이 바쁘고 힘들다고 불평하지 않겠노라고 이렇게 미리 살며시 약속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