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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zzy Jul 21. 2020

내가 아직 비행만한 것을 찾지 못한 이유

비행할 때 가장 나다운 승무원입니다


진- 한 버건디 색의 립스틱을 꽉 채워 바른 후 같은 색의 유니폼 모자를 눌러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건디가 된 거울 속의 나에게 크게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인다.


사실 밤이나 새벽 비행 전에 하는 메이크업은 다소 버겁다. 낮에 억지로 청했던 잠이 자연의 빛과 나를 제외한 세상의 일상 소음으로 인해 쉽게 성사되지 않았을 때, 그렇게 겨우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다 마침내 어둠의 시간이 찾아와 이제야 허겁지겁 갈구하던 수면을 채우려 하는 찰나 알람이 울린다. 오늘 비행은 새벽 1시 출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준비를 하는 시간인 밤 11시, 12시에, 몇 차례나 울려대는 알람과 계속 싸워대다 결국 항복하고 일어나 꾸역꾸역 화장대 앞에 서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아직도 절반은 감긴 눈두덩이에 섀도우를 칠하고, 이제 좀 자는가 싶어 쉬려 하던 눈꺼풀을 깨워서는 기어이 들어 올려 마스카라를 칠한다. 비행 가는 출근 버스 안에서는 여전히 피로가 가시지 않은 무표정으로 어떻게든 눈을 좀 더 붙여보려 노력한다. 그마저도 이런저런 고민에 마음이 어지러워 복잡한 생각들과 싸우다 보면 어느새 도착일 때도 있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참, 체력적으로 쉽지 않구나 하고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비행기라는 무대에 서는 순간부터는 어디서 갑자기 그런 에너지가 나는지 모르겠으니 말이다. 만석 비행이라 과연 비행기가 뜨기 전에 지상에서의 서비스를 모든 손님들에게 다 해드릴 수나 있을까 싶었던 때에도, 이상하게도 손님들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출처 모를 초인적인 힘이 솟아나 모든 것을 폭풍같이 해내고는 한다. 귀에 입이 걸릴만한 환한 미소와 어린이 프로에 나오는 구연동화 선생님 같은 하이톤의 목소리 역시, 비행기에 들어서면 유난히 확장되어 발휘되는 능력이다. 좀 전에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겨우 일어나서 온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긍정적 에너지가 주어지는 곳, 내게는 바로 비행기의 캐빈이다. 그리고 나는 그 캐빈을 마법의 공간이라 여긴다.


쉴 틈 없이 내내 서서 일하는 유난히 고된 비행을 두고 우리 승무원들은 비행기로 ‘날아간다’가 아닌 ‘걸어간다’는 표현을 쓰고는 한다. 주로 장거리 비행인 호주나 미국 비행을 걸어서 간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호주까지 13시간 동안 걸어간 것으로도 모자라 ‘뛰어갔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이 바빴던 비행이 있었다. 비행 중반이 넘어가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어찌나 정신없이 종횡무진 뛰어다녔는지 무릎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하강 준비를 하며 손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나섰을 때, 내 구역의 손님이었던 호주 아저씨가 호쾌하게 웃으며 ‘이제까지 비행기 타보며 만난 승무원 중에 네가 최고였어!’ 하고 칭찬을 해 주었다. 그 말 한마디에 13시간이 녹아내렸다. 그 칭찬 한마디, 그 환한 얼굴 하나가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그 길고 고된 비행이 마시멜로처럼 말랑해졌다.

마법의 순간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메인 식사가 나가지 않는 시간에는 차나 커피를 요구하려고 비행기의 주방인 갤리로 손님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은데, 내게 만들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 본인이 직접 차를 만들겠다고 하던 손님이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특별한 레시피가 있다며 내게도 똑같은 차를 한 잔 만들어주고, 작지만 우리에 대한 보답이라고 말하고 간 손님. 그 손님이 부린 차 한잔의 마법은 길고 지루하던 미국 비행을 단번에 기억에 남는 비행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비행에는 심지어 나에게 그저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비행기 맨 뒤의 갤리까지 찾아온 손님도 있었다. 한참 전에 샌드위치를 서빙해 드렸는데, 비행 끝무렵 찾아와서는 내 팔을 조심스레 잡으시던 아주머니. 나의 미소가, 그리고 친절함이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무려 나를 찾아온 그 손님의 친절함은 내가 가진 그것과 과연 비교나 될까.

영어도 잘 통하지 않고, 심지어 비행기를 타보는 것이 난생처음이라 모든 것이 어색하고 서툰 손님들도 많이 접하게 된다. 식사 서비스 때의 의사소통은 어려웠을지 모르나 비행기를 나가는 순간만큼은 그 손님들이 내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어 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등에서 온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비행기를 나서며 아이처럼 수줍게 웃으며 굳이 손을 흔들며 나간다. 때로는 내 손을 꼭 부여잡으며 눈으로 고맙다는 마음을 전한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들의 손짓과 눈빛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마법을 부린다.

만물 보부상처럼 여러 나라에서 수집한 기념품과 액세서리 등이 가득 든 상자를 펼쳐 보이며 그 날 비행의 모든 승무원들에게 뭐든 하나씩 골라 가지라고 하던 손님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캄보디아에서 자선 활동을 했었다고 서투른 영어로 이야기하며 옛날 사진을 보여주던 그 손님은, 그렇게 비행기에서 처음으로 내게 반지를 준 남자가 되었다.


이같이 수많은 마법의 순간들이 모여, ‘비행’은 내가 해온 일 중 가장 아름다운 일이자, 나를 가장 빛나게, 그리고 나답게 만들어 주는 일이 되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일을 하고, 손님들과 마음을 나누다 보면 어느새 캡틴은 착륙을 위한 안내방송을 한다. ’Ladies and gentlemen~’ 하기가 무섭게 나는 갤리에서 캡틴의 목소리에 맞춰 어깨춤을 추기 시작한다. 동료들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하다 이내 내 움직임에 합류한다. 비행 전의 피로, 마음속 어딘가를 채우고 있던 부질없는 고민이나 우울감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은 이미 저편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그 자리는 이제 이번 비행에서 만난 손님들과의 마법의 순간들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아직은 비행만한 것을 찾지 못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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