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행 후에 또 다른 비행 있어?”
비행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는 비행이라도 같이 일하는 크루들 사이에 간단히 수다 떨 시간 정도는 주어지게 마련이다. 서비스를 마친 후 우리는 점프싯(jump seat)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간단하게 식사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수다를 떨 타이밍이다. 물론 바쁜 비행이라면 엉덩이 붙이기가 무섭게 울려대는 콜벨로 다 같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야 어렵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손님이 적고 평화로운 비행인데 비행시간까지 길다면, 과장 조금 보태서 불과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난 한 크루의 인생사를 알게 되고, 그 친구의 현재 최대 고민거리(이라 쓰고 연애 상담이라 읽는다)를 다 같이 고민하고 조언까지 해 주는 시간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최근 비행에서 있었던 손님과의, 혹은 동료들 간의 에피소드, ‘친구의 친구’가 겪었다는, 그 누구도 출처를 명확히 알 수도 없을 치정이 엮인 루머, 어느 체류지의 호텔에서 유령을 ‘직접’ 봤다는 호텔 괴담까지, 무궁무진한 주제의 무한 수다가 펼쳐지는 곳, 바로 기내의 승무원 좌석인 점프싯이다.
일반 기본적으로 스몰톡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주제는 ‘이번 달 비행’이다. 수다 떨 시간이 별로 없거나 딱히 비행 중 그다지 친해지지 않았다 해도 큰 부담 없이 툭- 하고 건넬 수 있는, 소위 ‘기본템’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회사는 팀 비행을 하지 않는 데다가 크루 수가 워낙 많다 보니, 한 번 비행을 같이 한 크루와 또 비행을 할 확률은 그리 높지가 않다. 물론 어쩌다 다시 만날 수야 있지만 바로 당장 다음 비행, 바로 당장 이번 달의 비행에서 곧 다시 만날 확률은 특히나 더 적다고 하겠다. 그렇다 보니 주니어 때는 도대체 지금 막 만났으며 이 비행이 끝나면 다시 굳이 만나지 않을 확률이 높은 사이에 굳이 다음 비행이 어디인지, 이번 달에는 무슨 비행을 가는지 같은 것을 왜 서로 묻고 있는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승무원들이 안부를 묻는 방식이었다. 사람들이 보통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가족의 안부를 묻고,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은, 즉 ‘안부 묻기’ 혹은 ‘스몰톡’의 승무원 버전이라고 할까. 즉 승무원들 사이의 ‘이번 달 무슨 비행 있어?’는 영어로 치면 ‘How are you?’, 우리말로 하자면 ‘밥 먹었니?’ 정도랑 비슷한 급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I’m fine, thank you.’처럼 간단하고 의례적으로 대답하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세부사항을 공유하는 것을 즐기는 동료들도 많다. 그런 동료들은 이번에 무슨 비행이 있냐는 질문에 줄줄줄, 그 달에 가는 각종 나라와 도시 이름을 읊고는 했었다. 한 달 꽉 채워 비행한다면 한 달에 비행을 10개씩도 하던 우리였고, 그중 레이오버 비행이 많은 달에는 한 달에 6-7개의 각기 다른 도시에서 체류를 하다 오기도 했었다. 소위 인기 있는 취항지, 체류 시간이 긴 취항지, 혹은 신규 취항지 등을 받은 크루가 있으면 다들 부러워하게 마련이었고, 비행시간이 너무 많아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크루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Top 3에 늘 들 정도였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여행객은커녕 국경이 닫히기 시작하면서, 비행은 1/10 수준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이제는 크루들끼리의 안부인사가 조금 변했다. ‘이번 달에 어느 비행 가?’가 아닌, ‘이번 달에 비행 몇 개/몇 시간 있어?’ 혹은, 심지어 ‘이 비행 후에 또 다른 비행 있어?’로 말이다. 아 하나 더, 레이오버 비행이 있다면 ‘그 나라에서 호텔 밖에 나갈 수 있어?’ 이것도 추가 질문이다. 슬프지만 이것이 우리의 극단적으로 변한 현실을 가장 크게 반영하고 있다. 나는 4월 이래로 한 달 평균 2개의 비행을 했는데, 이것보다 많이 한 친구들도 있지만, 정말 전멸 수준으로 몇 달 내내 비행이 없거나 매우 짧은 비행 하나 정도가 주어지고 만 친구들도 꽤 보았다. 그러다 보니 같이 비행하는 크루들 중 누군가가 최근에 레이오버 비행을 하나 했다면 그 이야기만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특히나 비행기를 타고 어디 가는 일이 일상이었던, 눈만 뜨면 유니폼을 입고 비행을 하던 우리는 더더욱, 다른 나라는커녕 집에서도 거의 나가지도 못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었다. 물론 어쩌다 비행을 가서 승무원 자격으로 그 나라에 입국을 한다 해도, 호텔 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카타르가 아닌 다른 나라로 비행을 가서 ‘내 방’이 아닌 ‘다른 방’에서 쉬고, 유니폼을 벗어던지자마자 소위 우리가 ‘랜딩 비어’라고 부르는 맥주를 마시고, 그리고 잠들기 전에는 넷플릭스를 켜 두고 와인도 한 잔 하고, 호텔 방에서 룸서비스를 시키거나 우버 이츠로 그 나라의 로컬 음식을 시켜먹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굳이 유명하다는 관광지에 가지 않아도, 인스타그램 핫스팟에 가지 않아도 좋다. 잠시 내 주변을 바꾸고, 공기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크게 무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물론 그 도시 규정 상 호텔 밖에 나가도 상관이 없다면 더할 나위 없다. 다시는 그런 자유가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밖으로 나가, 마치 스펀지가 되어 그 도시를 다 흡수하기라도 할 기세로 하염없이 걷고 또 걸으며 그곳의 공기를 들이킨다. 그곳에서만 살 수 있는 물건을 한껏 쟁이기도 하고, 신선한 야채나 과일을 수트케이스가 넘칠 만큼 사서 돌아온다. ‘다음 비행 때 또 올 텐데 뭐’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며 그 낯선 도시에서, 처음 와보았지만 절대 마지막은 아닐 거라는 무모한 자신감만 가지고 호텔에서 잠만 잤던 적도 있었다. 연속되는 비행으로 극도로 피곤했고, 돌아가는 비행을 또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했고, 호텔에서 내 시간을 갖는 것 역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 바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 도시를 마주하는 일이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강한 확신 같은 것은 갖지 못할 것 같다. 전 세계 수많은 도시를 눈만 뜨면 드나드는 삶에 조금씩 젖어들어 그 모든 것을 얼마나 당연시 여겼던가. 국경이 막혀 자신의 본국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정도의 전 세계적 바이러스가 도는 팬데믹 상황이 와서야, 기존의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닌, 축복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다시 찾게 된다면 더 귀하게 여기겠노라고, 더더욱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 더 열정적으로 삶을 누리겠다고, 단 하루도, 그 어떤 도시도 무심하게 흘려보내지 않겠노라고. 우주복 같은 방호복을 입고 마스크에 고글까지 쓴 우리는 이제, 점프싯에 앉아 그런 이야기들을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