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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관계주의 문화

by 구찌

한국인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논하기 전에,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특성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요소들이 한국인의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나에게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인이 주었던 첫인상을 되짚어보자.

어릴 적, 한국인은 나에게 매우 세련된 이미지로 다가왔다. 이 세련됨은 단순히 패션과 외모에만 그치지 않고, 그들의 생활 전반에서 느껴졌다. 그래서 K팝을 비롯한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열광을 받는 현상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이미 20년 전부터 한국의 음악, 패션, 로맨스 드라마들이 서양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잠재력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인 스스로는 잘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나는 한국인들에게도 흑인 소울처럼 고유한 '흥'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K팝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K팝을 따라 하는 모습을 보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국인은 이미 20년 전부터 서양의 팝문화를 한국만의 스타일로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도 한국 가수들은 매우 힙하고 개성이 있었으며, 서양의 유행을 손쉽게 흡수하고 이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창조하는 독특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당시 한국의 방송국이 의상이나 가사, 컨셉 등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폐쇄적인 문화 환경 속에서도 한국 가수들이 이러한 세련미와 개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이는 한국 문화가 그때나 지금이나 가지고 있는 강점이자, 한국인이 지닌 유니크한 감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로 이러한 독특한 감각과 재능이 K팝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만든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한국 예능과 드라마를 통해 한국 문화를 자주 접해왔다. 처음으로 좋아했던 한국 연예인은 H.O.T였고, 처음 본 드라마는 송승헌과 송혜교가 주연한 '가을동화'였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한국 드라마와 연예인에 매료되었고, 한국에 대한 호감이 깊어졌다. 한국어를 따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가정 환경과 한국 TV 덕분에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익히게 되었고, 두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내가 전형적인 혼혈아의 외모를 가졌다고 상상할 수 있겠지만, 사실 나의 외모는 한국인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외모로 인해 한국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거나 대우를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한국에 처음 방문한 후, 10년 넘게 일상과 사회생활을 하며 지내다 보니, 한국인들은 내가 유창하게 한국어를 하고 한국 문화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그래서 가끔은 자기소개를 할 때,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릴 적 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은 시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축구 경기를 볼 때 어느 나라를 응원해야 할지 고민하곤 했다. 단순한 문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마치 어릴 때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는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했다. 20살이 되어서야 엄마가 더 좋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한국을 더 응원한다고 확신하게 된 건 20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나와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많은 이들이 한국 문화를 처음 접하는 경로는 주로 음악이나 드라마일 것이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한국 로맨스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 드라마가 인간관계의 복잡한 심리를 자극하고, 우리가 가진 원초적인 욕구를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인간관계에 대한 환상과 함께, 드라마 속에서 음식이나 패션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불러일으켜지는 경험을 자주 했다. 나 역시 드라마를 보면서 짜장면이 너무 먹고 싶었고, 주인공들이 입은 옷을 사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 드라마의 매력은 단순히 스토리 전개나 배우들의 연기력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심리적 묘사는 한국 사회의 예의 중심적이고 관계 지향적인 문화를 반영한다. 이 문화에서는 개인보다는 관계가 중요시되며, 드라마 속에서 얽히고설킨 복잡한 인간관계가 시청자들에게 강한 몰입감을 준다. 시청자들은 각 캐릭터의 감정선에 공감하며, 그들의 갈등과 화해 과정에서 자신을 투영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교한 심리 묘사는 한국 드라마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깊은 감정적 경험을 제공하는 이유다.

한국 드라마가 영화보다 먼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드라마는 시리즈 형태로 방영되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 동안 복잡한 인간관계를 풀어낼 수 있고, 시청자들에게 캐릭터와 감정을 서서히 이입하게 만든다. 반면, 영화는 제한된 시간 안에 이야기를 담아야 하므로, 그 깊이와 관계의 복잡성을 충분히 표현하기엔 한계가 있다. 특히, 한국 드라마는 주옥같은 OST로 감정선을 더욱 극대화하며,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는 K-pop과 K-드라마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함께 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한국 드라마가 인간관계를 이토록 섬세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한국 문화의 깊은 뿌리에 자리 잡고 있는 예의와 관계 중심의 유가사상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 속에 내재된 집착과 억압이 드라마 속에서 훌륭한 콘텐츠로 승화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 드라마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서양과 동양의 문화를 크게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또는 전체주의)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종종 일본과 한국을 같은 집단주의 문화로 분류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사실 일본은 집단주의, 한국은 관계주의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임진왜란에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일본 문화에서는 왕이나 성주가 성을 버리고 백성을 떠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일본인들은 보통 전쟁에서 패배할 때 할복하거나 항복은 하더라도, 도망가지는 않는다.

그에 반해 한국인은 가족을 위해서라면 대의를 저버릴 수 있으며, 할복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는 남은 가족이 걱정되어 죽음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정체성이 국가나 집단에서 온다면, 한국인의 정체성은 혈연과 지연 같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임진왜란 때 이러한 한국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일본군은 자신들의 빠른 진격으로 조선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 그들은 놀라운 속도로 한양을 포함한 조선의 주요 지역들을 점령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은, 조선의 왕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예상보다 더 빠르게 북쪽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이었다.

일본군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신했지만, 선조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과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점차 지치기 시작했다. 겨울철의 혹독한 기후, 보급의 어려움, 내부적인 사기 저하와 갈등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일본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때 선조가 성을 끝까지 지켰거나, 조금이라도 늦게 도망쳤더라면, 전쟁은 의외로 쉽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결국, 임진왜란 당시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가 전쟁의 양상과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이런 독특한 문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일어난 윌 미스미 사건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시상식에서 코미디언 크리스 록은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탈모증을 농담거리로 삼으며 "G.I. 제인 2를 기대한다"는 발언을 했다. 제이다는 탈모증으로 인해 머리를 삭발한 상태였고, 이 발언은 그녀와 윌 스미스에게 큰 불쾌감을 주었다. 이 순간 윌 스미스는 무대에 올라가 크리스 록의 뺨을 세게 때렸다. 이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윌 스미스는 "내 아내의 이름을 네 입에 올리지 마라"는 말을 반복하며 강하게 경고했다.

이 사건은 생방송으로 전 세계에 중계되었고, 그 즉시 인터넷과 언론에서는 이 장면이 큰 화제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오스카 역사상 가장 추악한 순간이라며 윌 스미스를 맹비난했고, 크리스 록의 차분한 대응에 대해서는 칭찬이 쏟아졌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한국인 네티즌들의 반응이었다. "가족 건드리는 건 못 참지", "우리 엄마보고 너네 엄마 대머리냐, 머리 민 김에 군대나 가라고 해라 뭐 이런 개그 쳤다 생각하면 못 참지", "턱을 날려야 기절인데 광대를 치셨네, 아실만한 분이" 등과 같은 댓글들이 주를 이뤘다. 이러한 반응은 한국 사회에서 가족을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관계주의 문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의 명예와 감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강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이 사건에서도 그 문화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발언과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인간관계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할까? 이 질문은 단순한 도덕적 딜레마를 넘어, 각 문화가 중시하는 가치관의 차이로 드러낸다. 서양에서는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크리스 록의 농담이 부적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대에서 발언할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시각이 주를 이뤘다. 반면, 한국과 같은 관계 중심의 문화에서는 개인의 발언이 가깝거나 친한 사람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을 때, 그 발언이 아무리 자유의 영역에 속하더라도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특히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의 명예가 걸린 문제라면, 단순히 말을 하거나 듣는 것을 넘어서는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이 사건은 각 문화가 무엇을 더 중요시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우선시되지만, 한국에서는 인간관계가 더 중요시된다.

사실, 이러한 관계주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단일화와 협력이 절실했던 산업화 시대에 일본의 집단주의는 미국의 경제적 우위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의 다변화 속에서, 한국의 관계주의는 국제 무대에서 일본을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이 외국에서 현지화 전략을 펼칠 때 자국의 문화를 고집하는 경향이 강했던 반면, 한국은 먼저 친밀감을 쌓고 관계를 맺으려는 유연한 접근 방식을 취했다. 이 접근법은 글로벌 무대에서 큰 강점으로 작용했다.

인공지능 시대 이전까지, 국가 간 하드웨어 기술 격차는 점점 좁혀졌고, 단독 경쟁에서 벗어나 협력과 상생의 시대가 도래했다. 한국의 관계 중심 문화는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며 국제 협력과 네트워킹에서 더 큰 성과를 거두는 원동력이 되었다. 경쟁의 핵심은 더 이상 자원의 양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양질의 관계를 형성하고 협력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관계주의는 강력한 경쟁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에서도 이러한 관계주의는 여전히 유효할까?

지금의 한국은 여전히 경제적 관점에서 강대국 사이에 놓인 '샌드위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고군분투했던 것처럼, 현재는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의 관계주의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친 결과다. 한국은 두 나라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완전히 선택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으며, 이는 외교적 유연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양쪽의 눈치를 봐야 하는 어려움을 초래한다.

관계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문화적 가치 체계다. 여기서 '우리'라는 개념은 가족, 직장, 국가 등 다양한 집단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러한 관계 중심의 문화에서는 개인의 성취보다는 공동체의 안정과 안녕이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며, 개인이 속한 집단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으로 여겨진다. 이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는 집단의 기대를 우선시하고, 그 기대에 맞추기 위해 개인의 입장을 양보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개인의 독창성과 창의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관계주의 문화가 중심이 되었던 사회에서, 이제는 각 개인이 가진 능력과 자율성이 그 자체로 큰 가치를 지닌다. 이미 전 세계에서 수십 명의 갑부들이 전 세계 재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1인 기업이 유니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는 인공지능 시대에서 개인의 역량과 창의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관계주의 문화에서는 여전히 개인의 목소리가 억압당하고, 집단의 규범에 의해 개인의 다양성과 창의성이 발휘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독창적인 사고와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집단의 압력 속에서 제한되며, 이는 국가 전체의 발전 잠재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국이 '샌드위치 신세'에서 벗어나 글로벌 무대에서 변화를 주도하는 리더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우리'보다는 '다양한 개인'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여기서 '다양한 개인'이란 단순히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닌, 스스로 사고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러한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개인들이 모여야만 진정한 혁신이 가능해지고,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필요한 리더십이 생겨난다.

특히 인공지능 시대에 한국이 지속적으로 빛을 발하려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인재를 지지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전통적인 규범에서 벗어난 이들의 사고방식이 혁신을 이끌어내는 핵심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점진적 발전을 넘어서기 위해, 기업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경쟁 우위를 확보하려는 과감한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존의 성공 방식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에서 유를 창출할 수 있는 창업자와 경영자를 발굴해 지원해야 하며, 이들은 전통적인 방식을 뛰어넘는 혁신적 접근을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의 기업 문화와 경제 구조 또한 변화해야 한다. 창업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단순히 돈을 목적으로 삼기보다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갖출 수 있도록,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과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 독창적인 사고를 가진 개인들이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기업은 지속적인 혁신을 이루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주체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콘텐츠와 제품을 만들어냈지만, 이를 담아낼 글로벌 플랫폼의 부재는 한국의 지속적인 성장을 제한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BTS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한국은 빌보드나 넷플릭스 같은 독자적인 글로벌 플랫폼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 뛰어난 콘텐츠를 생산해내지만, 그들을 주도적으로 보여줄 자체적인 무대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 스마트폰이 세계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그 안에서 구동되는 안드로이드나 iOS와 같은 앱 생태계를 갖추지 못한 점 역시 이를 보여준다. 결국, 한국은 본질적으로 그 틀 안에 갇혀 있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는 마치 손오공이 아무리 멀리 날아도 부처님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큰 꿈을 꾸고 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잠재력을 현실화하기 위한 전략적 변화와 도전이다.

한국은 여러 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구글조차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거의 유일한 독보적인 검색 엔진인 네이버와 다음이 있으며, 이는 한국의 디지털 생태계에서 자국 플랫폼의 강력함을 입증하는 사례다. 또한, 전 세계를 사로잡은 K-문화는 단순한 문화 수출을 넘어 문화 바이러스로 번지고 있다. 음악, 영화, 드라마, 게임에 이르기까지 K-문화는 이제 세계인의 일상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더불어, 한국에는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같은 세계적으로도 찬사를 받을 만한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 그들의 업적은 지금도 한국인들에게 자부심과 영감을 주며, 한국이 오늘날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 발전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의 저력은 한국 사회의 근면과 도전 정신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는 한국이 특별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깝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한국은 세계의 리더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팔로워 국가로 남을 가능성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한국인은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위기 대처 능력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지만, 동시에 그릇이 작고 경쟁에 지나치게 익숙하다. 마치 콜로세움의 전사처럼, 치열한 경쟁 속에서만 살아남으려 하다보니, 최강의 전사가 될 수는 있어도 왕이 되기는 어려우며, 콜로세움 자체를 지배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상황이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플랫폼 부재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 이 한계를 극복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다른 나라의 플랫폼 안에서만 경쟁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경제적 성과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이고 철학적인 성숙을 요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관계주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한국은 협력과 연대를 통해 큰 성과를 이룬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수평적인 소통과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창의성과 혁신을 촉진하려면, 획일화된 기준을 넘어 다양성을 포용하고, 눈치 보는 문화를 개선해 명확한 의사소통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사회가 이런 변화를 수용할 때, 세계적인 리더로서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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