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관찰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아 형성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는다. 20대뿐만 아니라 30대, 40대에도 그러한 경향이 있으며, 50대와 60대에 이르러서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회적 요구와 틀에 맞춰 살아가는 동안 자아 탐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일 수 있다.
물론, 최근의 10대와 20대 초반 세대는 이전 세대에 비해 자아에 대한 관심이 많으며, 자신을 표현하는 데 익숙한 모습이 두드러진다. 이는 이들이 다양한 정보와 기회에 더 많이 노출되었고, 자아 탐구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세대가 주로 외부의 기대와 사회적 기준에 맞춰 살아갔다면, 최근 세대는 스스로 자아를 탐구하고 자기 표현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행복"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며, 마치 절대적 진리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역설적으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가며, 행복을 특별한 목표로 삼기보다는 그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여유로움을 보여준다. 마치 "행복이란 별거 아니지, 언제든지 느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태도를 가진 듯하다.
이는 행복을 자주 경험하면, 그것을 특별한 상태로 인식하지 않고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행복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끊임없이 언급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실제로 행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행복을 과하게 추구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행복을 멀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행복해?"라는 질문 외에도 "이상형이 뭐야?"라는 질문을 자주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자연스러운 사람이 좋다"고 답한다. 사실 나는 이상형뿐만 아니라 성별에 상관없이 자연스러운 사람에게 끌린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애써 이끌려고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따르오게 만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이들은 행복을 애써 추구하지 않아도 그 속에서 행복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진지한 삶을 살면서도 결코 지루하지 않다. 억지로 웃음을 주려 하지 않아도 그들의 존재 자체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솔직하게 말해도 미움을 받지 않으며, 특별히 예의를 차리지 않더라도 그들의 편안함 속에서 친근함이 느껴진다. 명품을 입지 않아도 그들의 인품 자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기며, 순수함과 확고한 원칙을 동시에 지닌다. 이들은 세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기준을 명확히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안정감과 신뢰를 준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자연스러움 속에서 인간적인 매력이 발현된다.
내가 박진영을 계속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연예계는 여러 제약이 있어 자연스럽게 행동하기가 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박진영은 내가 본 연예인 중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그 속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박진영의 자연스러움은 그의 음악과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그를 더욱 특별한 인물로 만들어준다.
박진영은 내가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나에게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준 인물이다. 그의 삶과 철학은 내가 꿈과 행복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과거 어른들에게 배운 행복은 주로 한 분야에서 성공하고, 안정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다. 박진영 역시 그러한 조언을 따르며 때때로 행복을 느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 결핍은 오랜 시간 동안 그를 괴롭혔고, 이를 찾기 위해 그는 깊은 자기 탐구의 여정을 걸어왔다.
박진영의 자연스럽고 진정성 있는 말과 행동은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으며, 그의 경험은 내게 꿈과 행복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열어주었다. 그를 통해 나는 외적인 성공이나 성취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내면의 만족과 자아 실현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민하게 되었다. 박진영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라, 한때는 나의 인생의 중요한 시점마다 깊은 가르침을 준 스승과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았다.
서른이 넘어 마지막으로 다니던 부동산 대행사를 그만두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멈추고 3주간의 해외 여행을 떠났다. 잠시의 휴식을 기대하며 떠난 여행이었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을 보고 코로나 사태의 시작을 알게 되었고, 이 사건은 내 삶에 예상치 못한 전환점이 되었다.
코로나 시기는 나에게 내 삶을 깊이 성찰할 기회를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 시기에 독서를 통해 새로운 관점과 지식을 쌓으며 점차 내면의 평화를 찾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경제적 자유나 성공과 연결짓지만, 내게 독서는 꿈을 찾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당시 나에게 가장 절박했던 것은 돈이나 성공이 아니라, 꿈이었고 그 꿈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계속 괴롭혔다. 그래서 나는 꿈을 찾기 위해 독서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박진영의 삶과 그가 던진 질문들이 내게 큰 영향을 미친 것처럼, 나도 꿈을 찾고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잘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설령 그것을 발견한다고 해도, 사회적 성공이나 경제적 안정과 같은 외적 가치들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은 꿈을 찾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것이며, 때로는 그 과정이 너무 길어지면서 혼란과 좌절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꿈이란 역설적으로, 고민할 필요 없이 이미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일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자기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을 발견하기 위해서이며, 그 성찰은 단순히 내면을 바라보는 행위가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자아성찰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러한 자아성찰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통찰력뿐만 아니라, 꾸준한 인내심이다. 독서는 이 과정에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독서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지혜를 빌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며, 우리가 잊고 있던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금 들을 수 있게 한다.
'인간은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라는 개념은 우리가 사고에 있어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려는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인간은 종종 깊은 사고를 피하며, 표면적인 생각에 그치기 쉽다. 이는 우리가 하루 종일 하는 생각 중 상당 부분이 무의식적인 잡생각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현대인은 스마트폰과 미디어 콘텐츠에 쉽게 몰입되며, 이러한 환경에서 의식적으로 자아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한국인이 독서를 통해 깊이 있는 자아성찰을 하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 있다. 독서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사고 패턴을 깨고, 의식적인 사고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깊이 있는 생각을 할 기회를 제공하는 독서를 멀리하면,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와 본성을 파악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행복해?', '이상형이 뭐야?"라는 질문들은 사실 무의식적인 사고 패턴의 일환으로, 사회적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에 부합하려는 욕구를 반영하는 질문일 수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스스로를 탐구하기보다는 '어떻게 보여질까?'라는 표면적 고민에 그칠 수 있다. 만약 한국인들이 의식적 사고에 더 익숙해진다면, 그 질문들은 '행복이란 무엇일까?', '내(네)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와 같은 더 깊고 본질적인 질문으로 변화할 것이다.
무의식적인 사고가 일상 속에서 습관화되면, 우리는 말할 때도 무의식적으로 실수를 범할 가능성이 커진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이 '다르다'와 '틀리다', '가르치다'와 '가리키다' 같은 표현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 나는 이러한 언어 실수가 단순히 개인의 언어 능력이나 특정 교육 수준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공한 CEO, 부유층, 유명 강사, 심지어 대학 교수들까지도 이러한 표현을 혼동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면서, 이 현상은 단순한 지식의 부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는 단순한 지식의 부재보다는,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습관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즉, 그들이 어릴 때부터 잘못된 표현을 듣고 배우면서 무의식적으로 익힌 언어 사용 습관이 고착된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와 표현을 반영하는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에,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언어 사용은 우리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역할로 여겨지며, 종종 그 과정에서 선배들이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훈육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행위가 후배들에게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면서, '가르치다'라는 표현이 '가리키다'와 혼동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싶다. 선배가 후배에게 길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두 단어가 자연스럽게 섞여 잘못 쓰이는 경향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혼동은 한국 사회의 문화적 배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전통적으로 위계질서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상사나 선배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다름'은 쉽게 '틀림'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상사나 선배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 틀린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환경에서,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용하게 되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파이팅'과 '힘내'의 혼용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원래 영어의 'fighting'은 싸우다라는 의미지만, 한국에서는 이를 '힘내!'나 '열심히 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이는 단순한 언어의 변형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상황에 상관없이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반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이팅'은 잘못된 의미로 사용될 뿐 아니라, '힘내'와 '열심히'라는 표현의 경계도 모호해지게 만든다.
'가르치다', '다르다', '힘내'와 같은 단어들이 잘못 사용되는 현상은 단순한 언어적 실수로 볼 수 없다. 이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인식적 경향을 반영하는 일종의 거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을 빌리자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은 우리가 언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형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인간은 언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경험하고, 세상을 해석하며,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닌, 우리의 사고와 존재 방식을 담아내는 틀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조언을 요청하지 않은 후배에게 무의식적으로 가르치려 들지 않고, '다름'을 '틀림'으로 착각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파이팅 대신 '힘내'라는 정확한 표현을 써야 한다. 우연히도, 박진영처럼 진정성 있고 자연스러운 사람들은 언제나 정확한 표현을 구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자연스럽고 진솔한 태도는 사람들에게 더 큰 존경을 얻게 하며, 이를 통해 나는 다시금 표현의 중요성과 진정성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는 경향은 위계질서와 사회적 통념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이런 태도는 개인의 사고를 제한하고, 새로운 관점과 배움을 받아들이는 기회를 축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런 구조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나 의견이 쉽게 존중받지 못하고, 다름이 틀림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커지면서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보다는, 기존의 방식을 따르는 데 익숙해지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태도다. 다양한 의견과 방식을 수용하지 못하면 사고는 경직되고 고집스러워지며, 이는 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릴 기회를 잃게 만든다. 삶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차이를 존중하며 그 다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태도는 우리의 행복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이 열린 태도의 뿌리는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내적 동력이다. 어린 시절 우리가 쉽게 행복을 느꼈던 이유는 세상이 낯설고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작은 발견 하나에도 놀라움과 기쁨을 느끼며, 그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익숙한 것들에 안주하고, 새로운 것을 탐구하려는 호기심을 잃게 된다. 이로 인해 삶은 단조로워지고,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줄어든다. 철학자들이 강조한 '탐구하는 삶'이란 바로 이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삶이다. 호기심은 우리를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게 하며, 삶의 깊이를 새롭게 발견하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호기심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삶의 질과 행복을 지키는 중요한 요소임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