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원어나더, 어쩔 수가 없다....
토요일 모처럼 영화 두 편을 보았다. 오전에 본 원 배틀 애프터 원어나더와 오후에 본 어쩔 수가 없다. 두 영화는 '폭력'을 이야기한다. 전자가 거대한 시스템의 폭력에 대한 저항과 해방이라는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진다면, 후자는 자본과 자동화가 만들어낸 세계의 폭력성, 즉 은폐된 폭력의 현실을 블랙코미디의 형식을 빌려 드러낸다.
저항의 서사: 「원 배틀 애프터 원어나더」
제목부터 전투적인 이 영화는 미국-멕시코 접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이민자 통제와 저항의 서사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가치로 전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헐렁한 연기가 미국이라는 거대 폭력의 완고한 잔인함과 대비된다. 불법 이민자라는 주홍글씨 아래 억압받는 이들의 현실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여전사들의 저항의 말과 몸짓은 인상적이었다. 경찰과 군인의 노골적인 폭력성에 맞서는 그들의 저항을 영화는 멋지고 힘 있게 보여준다. 모성이나 부성에 대한 환상 대신, 연약한 자를 돌보아야 한다는 더 큰(?)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이 좋았다. 배경 음악은 저항의 서사에 묘한 신비감을 더했다.
은폐된 폭력의 서사: 「어쩔 수가 없다는」
오후에 본 박찬욱의 영화는 자본의 폭력성이 어떻게 한 개인의 삶을 파국으로 이끄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병헌의 헐렁하고 바보스러운 캐릭터는 디카프리오의 인물과 묘하게 겹치면서, 실직으로 인한 해프닝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블랙 코미디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벌목 장면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어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제지공장이라는 산업화 시스템이 은폐했던 자연에 대한 폭력을 환기시킨다. 그 폭력이 이제 자동화와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생산 시스템 아래 인간의 일자리를 앗아가는 실직의 폭력성으로 전이되었음을 은유한다.
주인공 '만수'는 재취업에 성공했지만, 아무도 없는 공장에서 일한다. 그가 은폐한 살인이 아니었더라도 그가 차지한 일자리는 산업 시스템의 전환 속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저항조차 불가능한 소시민의 삶이 자본의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망가지고, 생계를 위해 자신을 정당화하며 폭력을 자행하는가를 목도하게 한다.
오전의 영화가 혁명을 선택했다면, 오후의 영화는 파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소시민의 절망적인 생존 현실을 고발한다고 보였다. 두 영화는 모두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원 배틀 애프터 원어나더"가 이민자, 유색인종 대 국가 권력이라는 이념적 대립을 통해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정당한(?) 폭력과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면 "어쩔 수가 없다"는 자본과 자동화 대 소시민의 대립을 통해 생존을 위해 벌이는 나약하고 비루한(?) 폭력을 보여준다.
전자가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희망과 해방의 폭력을 재현하고자 했다면, 후자는 은밀하게 스며들어 삶을 잠식하는 자본의 폭력이 어떻게 평범한 인간을 스스로 폭력의 주체가 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생존을 위한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끝없이 떠밀려오는 불안의 삶은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