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th Century Women (2016) - IMDb https://www.imdb.com/title/tt4385888/
나는 두 딸의 엄마다. 지금도 한 번뿐인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 여전히 익숙하지 못한 채... 가상의 엄마를 흉내 내듯 그렇게 엄마 노릇을 하며 살아냈던 것 같다. 바스러질 듯 작고 가녀린 아이를 어떻게 안아야 할지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조바심 냈던 시절을 지나 그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또 함께 지내면서 누구나 그렇듯 연습 없이 실전 엄마가 되었다.
대학원을 다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출근과 함께 맡기고, 퇴근과 함께 데려오는 일을 반복했다. 적어도 저녁을 먹이고 씻기고 함께 잠드는 일은 내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이들이 깨기 전까지 오늘 해야 할 중요한 일 혹은 작업을 어느 정도 갈무리해야 했다. 항상 눈을 먼저 떠서 내게 다가온 건 큰 아이였다. 다정하게 "안녕, 잘 잤어"라고 말을 건네는 대신 "벌써 일어났니"로 아이를 대했던 순간은 늘 후회가 된다. 큰아이는 다가와서는 안 될 것 같은 엄마의 사뭇 진지한 모습을 감지했다. 방안이 아니라 문지방에 앉아서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고 그랬다. 아픈 기억이다.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맡아 진행하거나 대학원에서 발표를 앞둘 무렵엔 늘 둘째 아이가 아팠다. 둘째 아이를 데리고 새벽에 응급실을 가기도 했고, 그렇게 아픈 아이를 두고 출근하면서 모질게 내 할 일 챙기는 나에게 스스로 나쁜 엄마라는 자책하기도 했다. 어떻게 나쁜 엄마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으로부터 벗어나 당당한 엄마일 수 있을까? 좋은 엄마가 있다면, 좋은 엄마는 과연 어떤 엄마일까?
영화 속 엄마는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아이가 자랄까 두려워한다.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란다. 대공항시대를 거처 생존해 온 자신과는 달리 자유롭게 모든 것을 누릴 줄 알기를 바란다. 두 젊은 여성들과 이런 고민을 공유하고 그 역할을 부탁하기도 하지만 결국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엄마이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이는 이미 자기 욕망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영화 속 엄마는 품위가 있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롭고 폭넓은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엄마의 생각과 고민은 애틋함을 넘어선 품격 그 자체다. 아이가 나와 같지 않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벗어날 수 없었던 한계를 넘어서 훌훌 멋지게 비상하고 자유롭기를 바랐던 내 마음과도 맞닿는 마음말이다. 납득하기 어려운 가치 혹은 문화에 대한 한계치 없는 인내를 보이는 모습은 세기를 넘어서는 위대한 모성을 느끼게 해 준다. 이 모성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한계에 상당히 저항하지만 적당한 표현이 없으므로... 영화 속 엄마는 그런 의미에서 당연히 좋은 엄마다.
어설프고 나약하게 때로는 편협하고 독단적으로 수행해 왔던 내 엄마 노릇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새로운 세대가 열어가는 세상, 내가 살아온 세상의 가치와 의미를 적용해 가면서 옳고 그름을 손쉽게 단정해버리고만 그 몹쓸 관성에 아이들은 강렬하게 저항했던 것 같다. 해봐서 아는데 혹은 살아봐서 아는 데로 가두는 말들을 얼마나 현란하게 포장해 댔던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좋은 엄마는 절대로 아니다.
나는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그렇게 엄마노릇을 수행했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서 내 한계를 인정하고 내려놓아야만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영화 속 엄마처럼 무한의 인내가 없는 나는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아이들과 소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엄마에게 무한한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그 아름다운 고뇌와 숭고한 인내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