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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화 Feb 24. 2020

영원한 '도도'의 아이콘, 비비안 리의 불꽃같은 사랑

--비비안 리 ♡ 로렌스 올리비에

   나이 들어가는 징조인가? 라디오를 듣다가도 학창 시절에 즐겨 들었던 유행가가 흘려 나오면 마치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갑다. 영화도 그렇다. 제작비를 몇 백억 씩 쏟아부은 불록버스터도 많고, 재미있고 자극적인 소재의 영화도 많지만 그래도 이른바 '올드 시네마 명작'에 들어가는 영화만은 못한 것 같다. 그런 영화들에는 자극적인 맛은 없어도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2%쯤 더 들어있는 것 같다.    


▶'도도'와 '청순'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여배우, 비비안 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를 거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저물어 가는 노을을 보며 단호하게 말하던 도도한 아가씨 스칼렛 오하라를 기억하는가?


161센티미터의 키와 47킬로그램의 아담한 체구에 매력적인 하트형의 작은 얼굴, 초록색 눈동자, 오뚝한 콧날, 잘록하게 들어간 개미허리. 정말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바비인형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비비안 리(Vivian Mary Hartley :1913, 11, 5 ∼1967, 7, 7)를 기억하는가? 


뭇남성들을 죄다 무장해제시켜버리는, 도도함과 거만함이 하늘을 찌를 듯 하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스칼렛 오하라의 캐릭터를 비비안 리만큼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연기자가 또 있을까 싶다. 그녀는 마치 스칼렛 오하라를 스크린에 담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이 한 편의 영화로 일락 세계적인 톱스타로 자리매김했고, 더불어 만인의 연인이 된 비비안 리. 그녀는 또 다른 작품 <애수>에서 이전의 까칠하고 도도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청순가련형 여주인공 역을 완벽하게 연기해 찬사를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는 정신분열증에 걸려 점점 미쳐 가는 여주인공 역을 너무도 소름 끼치게 재현해내어 비평가들마저도 극 중 인물이 비비안 리 본인으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되었어도 우리가 그녀를 잊지 못하는 까닭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 아니라, 외모만큼이나 눈부신 명연기에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내용이야 뻔하지만 몇 번을 리플레이해 봐도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영화가 진정한 명작이고 진정한 명배우가 아닐까? 

시쳇말로 '자체 발광'이란 말이 가장 적합한 표현인 듯싶은 비비안 리, 지구촌 모든 남자들의 우상이었던 그녀였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의 일생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생애 단 한 번뿐인 운명적인 사랑이 다가서다.


비비안 리의 출신 배경이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단지 인도에서 출생했다는 것밖에는.

여기서 우리는 비비안 리를 조금 밀쳐두고, '로렌스 올리비에'라는 배우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배우로서의 사회 공헌도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와 더 나아가 귀족 칭호까지 받은 영국이 낳은 최고의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Kerr Olivier: 1907, 5, 22∼1989, 7, 11). 그는 비비안 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사랑했던 한 남자였다. 그것도 자신을 다 태우도록 뜨겁게. 물론 그는 그토록 한 여자에게서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충분했다. 


연극과 영화계 전반에 있어서 로렌스 올리비에가 이룬 업적은 훌륭하다거나 대단하다는 수식어로는 뭔가 부족하다. 그는 연극 무대에서 그만의 뛰어난 성격 묘사로 연극이든 영화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현대적으로 가장 잘 이해하고 연기한 배우 중 하나로 손꼽힌다. 리얼하고 생명력 있는 연기로 관객에게 셰익스피어 작품에 담긴 메시지를 친숙하게 전달한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1963년부터 1973년까지 10년 동안 영국 국립극장 연출자로 있으면서 영국 연극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목사인 아버지 아래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로렌스 올리비에는 성품이 온화하고 신사다웠다. 고전적인 백인 미남 얼굴에,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귀족의 기질이었다.

연기력이 타고났는지, 그는 이미 10세 때부터 브루투스와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을 거울을 보며 혼자서 연기 연습을 했다. 마침내 그는 1929년, 연극 <이층 살인사건>으로 브로드웨이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비비안 리와 로렌스 올리비에의 첫 만남도 물론 연극 무대였다. 1934년, 런던 로열 극장에서 객석에 앉은 비비안은 <햄릿> 역을 맡은 혈기왕성한 올리비에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엄청난 연기 내공과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그가 곧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비비안. 올리비에는 격정적인 연기로 객석의 여자 관객들은 물론 당시 떠오르는 샛별 비비안까지 단숨에 사로잡아버렸다.    


 그도 이 절대지존의 미녀 비비안한테 끌리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후에 비비안을 처음 본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비비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의 소유자다, 내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당황스러울 정도의 매력을 가진 여배우이다."라고.    

▶ 당신과 나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서로에게 첫눈에 반한 이 두 남녀가 마음 놓고 사랑하기에는 넘어야 할 장벽이 한 둘이 아니었다. 우선 비비안도 올리비에도 모두 각자 가정이 있는 유부녀, 유부남이었다. 비비안에게는 한없이 자상하고 착하지만, 짜리 몽땅에 촌스럽기까지 한 변호사 리 홀만이 남편이랍시고 곁에 턱 버티고 있었고, 올리비에 역시 비비안만큼이나 아름다운 여배우 질 에스몬드와 혼인관계에 있었다. 더구나 올리비에는 질과의 사이에서 첫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각자 가정이 있더라도 비비안은 자신의 운명적인 사랑을 멈출 수 없었다. 특유의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들한테 숭배받고 살아온 그녀였기에 남자한테 먼저 작업을 건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올리비에의 사랑만 얻을 수 있다면 못할 것이 없었다.


 마침내 비비안은 용기를 내어 올리비에한테 데이트 신청을 했고, 그 역시 이 매혹적인 여성한테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두 사람은 같은 영화에 주연배우로 출연한다. 두 사람은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사랑으로 엮어진다. 멈추기에는 너무 뜨거운 사랑의 불꽃이었다. 이제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어떻게 각자의 파트너와 적법하게 이혼하고 결혼을 할까, 하는 고민뿐이었다.


 비비안에게 이혼은 전혀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었다. 착하고 멍청할 정도로 우직한 남편 리 홀만은 스스로도 비비안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그녀가 이혼을 요구해도 순순히 응해줄 것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그녀와 친구 사이로 지내는 걸로 만족해했다. 문제는 올리비에의 아내 질 에스몬드였다. 그녀는 올리비에를 성공시키고자 자신의 꿈을 접은 데다가 태어난 아들도 있어서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비비안과 올리비에가 영국으로 돌아오자, 질은 남편을 놔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비비안을 찾아갔다. 하지만 돌부처를 녹이듯 비비안의 매력이 분노한 질의 마음까지 녹인 걸까? 질은 더 이상 비비안을 비난할 수 없어 자기가 양보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멈추라고 해서 멈춰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님을, 그 누구도 그 사랑을 막을 수 없음을 그녀도 깨달았던 것이다.    



▶ 그들의 행복했던 시간, 그리고 불행의 그림자.


 비비안과 올리비에는 마치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녔다. 사석이든 공개석상에서든 서로에게서 눈과 손을 떼지 못할 만큼 두 사람은 깊이 사랑했다.

그러던 중 올리비에가 영화 <폭풍의 언덕>에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할리우드로 가게 되었고, 비비안도 그의 상대역을 따내기 위해 그를 따라 할리우드로 날아갔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인생 대역전의 기회를 잡는다. 바로 그녀의 대표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역으로 캐스팅된 것. 그녀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아 세계적인 대스타로 발돋움했다. 


 두 사람은 1940년 8월 마침내 결혼식을 올린다. 그들은 연극계에서 황금커플이 되었다. 열렬히 사랑하는, 행복한 나날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신의 시샘 때문인지, 그들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비비안은 완벽한 미모와 연기력까지 소유한 매우 매력적인 여자였지만 대단히 복잡한 사람이기도 했다. 성장기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감정이 불안정하고 격했다. 올리비에를 향한 사랑이 그녀를 더욱 파멸로 몰아넣고야 말았다.


비비안에게 두 번째 오스카상의 영광을 안겨준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그녀는 정신분열증에 걸리는 여주인공 역을 맡아 열연했는데, 사람들은 그녀의 완벽한 연기에 찬사를 보냈지만 사실은 그것이 곧 그녀의 실제 모습이었다. 고된 촬영 스케줄과 군대 위문공연으로 피로에 절여 얻은 결핵과 설상가상으로 첫아이의 유산은 그녀의 심신 모두를 지치게 했다. 결핵이 조울증과 정신분열증과 함께 악화되었다. 


그녀는 갈수록 신경질적으로 변했고 우울증과 히스테리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런 그녀를 지켜봐야 하는 올리비에의 고통 역시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제정신일 때는 한없이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였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할 때에는 그에게 집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정신과 치료도 늘 그때뿐이었다. 비비안은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길까 봐서 늘 전전긍긍했고, 결국 위로받을 곳이 필요했던 그는 그녀의 예감대로 20년 간의 결혼생활을 접고, 연극에서 상대역이었던 30세 연하 조안 플로라이트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여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어서였을까? 1960년 어느 날, 비비안은 올리비에에게 돌연, 이제 당신이 싫으니 이혼해 달라고 마음에도 없는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없이 긴 인생을 사느니 차라리 그와 함께 하는 짧은 인생을 택하겠어요. 그가 없으면 사랑도 없으니까요."    


▶긴 이별, 그리고 영원한 사랑.


비비안으로부터 이혼하자는 제의를 받은 올리비에는 마침내 그녀와 이혼하고 1961년 조안과 재혼한다. 사랑하는 올리비에를 잃음으로써 결국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비비안은 1967년 7월 7일 말기 폐결핵과 외로움으로 인한 정신분열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항암치료 때문에 같은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던 올리비에는 떠나는 그녀의 영혼을 밤새 지켰다. 그는 자서전에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그녀 앞에 서서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비비안이 그렇게 된 데는 내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결코 떨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상처 받기 마련인데, 이 두 사람은 그 마음이 똑같았던 것 같다.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올리비에는 조안에게도 헌신적인 남편이었지만, 어느 날 집을 방문했을 때 80대로 접어든 올리비에가 눈시울을 적시며 비비안의 영화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그리움에 울먹이며 말했단다. "그게 사랑이었어. 그게 진짜 사랑이었다고."라고.

              <글 : 홍지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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