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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화 Mar 18. 2020

영원한 아름다움의 대명사

             ---만인의 연인,   오드리 헵번

 까맣고 둥근 눈, 너무나 깜찍하거나 세련되고 지적인 헤어스타일, 이슬만 먹고살 것 같은 가냘픈 몸매와 청순한 마스크. 모두가 홀딱 반할 수밖에 없는 그녀는 난생처음 스쿠터를 타고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한다. 처음으로 자유롭게 구경해보는 세상은 그녀에게는 너무나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스페인 광장의 계단에 주저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그녀는 한 잘생긴 남자를 운명처럼 만나 하루 동안의 사랑을 시작한다. 바로 그 유명한 영화 ‘로마의 휴일’의 전체적인 줄거리다.


 이 한 편의 영화로 오드리 헵번은 무명 단역배우에서 일락 세계적인 톱스타 반열에 올랐으며 만인의 연인이라는 칭송을 영원토록 자신의 이름에 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나이가 들어서도, 죽어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이름으로 세계인의 가슴속에 기억되고 있다.     


 ♥ 세기의 연인, 만인의 연인 오드리 헵번


 왕년의 최고 여배우라는 칭송이 무색할 만큼, 그 흔한 보톡스 주사를 모르고 사는 것처럼 얼굴에 주름 투성인 노년의 오드리 헵번이 아프리카의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져 눈물이 핑 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진실되고 따뜻한 마음에 감동받았을 것이다.


 햅번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 그 옛날 라이벌 관계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힘께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왕년의 톱스타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게 많이 늙어, 한마디로 쭈글탱이 할머니들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심심하면 한 번씩 수많은 남자와 염문을 뿌리던 테일러가 여전히 아름답다는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마녀처럼 도가 지나친 화장과 온갖 사치스러운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등장한 것과는 정 반대로, 햅번은 자신의 나이에 걸맞은 수수한 차림으로 등장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유니세프의 친선대사로 활동 중이었던 그녀는 무대에 올라 간곡한 어조로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기아들을 도와달라는 짧은 연설을 했다. 너무나 간절하게 호소하며 흘리는 그녀의 눈물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적시기에 충분했고 그 어떤 화려한 보석보다 아름다웠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인형처럼 예쁘고 청순한 모습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진실로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그녀의 빛나는 노년 모습을 더 많이 기억하고 닮고 싶다.


 1950대와 60년대 할리우드의 최고 톱스타 오드리 헵번(Andrey Kathleen Ruston: 1929, 5, 4~1993, 1. 20)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아버지와 폴란드계 네덜란드 남작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햅번은 4살 때 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교외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햅번 가족은 중립국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남작 출신 어머니는 아버지와 잦은 불화를 일으켰고 결국 햅번의 부모는 이혼을 하고 만다. 그래서 어린 햅번은 도보 해협을 오가며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이유로 햅번의 학력은 초등학교 5학년 수료가 전부다.


 설상가상으로 네덜란드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 때에 독일군이 마을을 점령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햅번은 굶주림과 공포,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 그런 유년의 슬픈 기억들로 인해 그녀가 그토록 굶주린 이들을 돕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평생 하고 싶었던 역할이 바로 ‘안네 프랑크’ 역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햅번은 발레리나가 되고자 아버지가 있는 런던에서 발레학원에 다니게 되지만, 170센티의 큰 키로 발레리나가 되기란 힘든 일이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외가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더 이상 기댈 수가 없었던 햅번은 사진 모델과 코러스 걸 등의 아르바이트를 해 생활비를 벌었고 틈틈이 펠릭스 에일머 교수의 드라마 강의를 들으며 배우의 꿈을 키워갔다. 


 그러다가 1950년 화장품 광고모델이었던 햅번의 사진을 보고 찾아온 마리오 덴비 감독의 제의로 연극 영화 ‘낙원의 웃음’에 단역으로 첫 출연을 하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이후 ‘첫사랑’ 등 6개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 역시 주목받지 못하다가 영화 촬영 때문에 간 모나코에서 운명적으로 콜레트 여사를 만난다. 그녀와의 만남은 햅번을 무명 단역배우에서 일락 세계적인 톱스타로 탈바꿈시키는 결정적이 계기로 작용한다. 햅번은 콜레트 여사 원작의 연극 ‘지지’의 브로드웨이 공연에서 주연배우로 발탁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스타가 된다. 행운은 행운을 부른다고 했던가. 그 공연을 인상 깊게 본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그녀에게 자신의 영화에 출연해 줄 것을 제의했다. 그 영화가 바로 햅번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세계적인 톱스타의 자리에 우뚝 서게 해 준 ‘로마의 휴일’이었다.


 원래 앤 공주 역에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고려되었으나 결국 햅번의 자치가 되었다. 남자 주인공 그레고리 펙은 헵번에게 주연 자리를 내주었다. 펙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영화 촬영이 끝난 2주일 후에 그는 갑자기 영화 광고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는 에이전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번 영화의 여배우가 첫 작품에서 오스카상을 탈 것 같은데 그녀의 이름이 나와 같이 위쪽에 쓰여있지 않으면 얼마나 욕먹겠어요..'라고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목이 'Gregory Peck in Roman Holiday'였다. 그의 예감대로 오드리 헵번은 이 한 편의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단번에 거며 쥐었다. 그녀의 나이 이제 갓 스물 넷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관능미와 섹시미가 여배우의 결정적인 성공 조건으로 치부되었던 할리우드의 얄팍한 통념을 햅번은 특유의 우아함과 청순함으로 산산이 깨부쉈다. 빼빼 마른 몸매와 호기심 가득한 눈, 세상 물정 모르고 로마거리를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소국의 공주 역을 햅번보다 더 잘 소화해낼 여배우는 지금까지도 없다.


 '로마의 휴일‘ 이후 그녀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전쟁과 평화’ ‘사브리나’ 등 제목만 들어도 익숙한 굵직굵직한 영화의 주연배우로 활동하면서 청순하지만 가련하지 않은, 즉 겉으로는 한없이 연약해 보이지만 결코 남자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외유내강형의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여배우들이 자신의 늙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주저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햅번은 “나는 내 나이에 맞는 역을 하고 싶다"며 1976년 ‘로빈과 마리안’이란 영화에 출연해 완숙미가 돋보이는 연기로 사람들한테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 사랑받기보다 진정 사랑할 줄 알았던 아름다운 여인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만인에게 사랑받았던 그녀. 하지만 그녀의 사랑과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브로드웨이에서 함께 공연하면서 사귄 감독 멜 화라와 1954년에 결혼했지만 남편의 외도로 14년 만에 이혼을 했고 이후 이혼 후유증으로 우울증을 앓으면서 알게 된 자신의 정신과 주치의 안드레아 도치와 재혼했지만 12년 만에 다시 이혼했다.

 각각 아버지가 다른 두 아들들과 함께 살며 영원토록 아름다움을 간직할 것 같았던 햅번의 얼굴에도 주름이 늘어갔다.   


 우리가 곱게 늙은 노년의 햅번을 본 건 영화가 아니었다. 1988년, 환갑의 나이로 TV와 신문에 나온 그녀는 뜻밖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유니세프 친선 대사의 자애로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되새기며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세계 오지의 어린이들을 구호하고자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 여러 곳을 방문해 구호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1992년에는 최빈국 소말리아를 방문에 기아와 질병의 고통에 방치되어 있는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줄 것을 전 세계에 호소해 많은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죽어가고 있었다. 


 대장암에 걸린 그녀는 수술에도 실패해 1993년 1월 20일 64세의 일기로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자택에서 끝내 사망하고야 만다. 그 해 3월 29일 아카데미 인도주의상을 수상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후라 큰아들인 숀 햅번 패러가 대신 수상했다. 그녀가 떠난 지 10년 후, 사랑을 실천하고자 애썼던 그녀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오드리 햅번 평화상이 제정되었다.


 만인의 연인이자 세기의 연인 오드리 헵번. 그녀는 사랑받기보다 자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것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던 진정한 미(美)를 소유한 여인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두 아들한테 유언 삼아 보낸 편지는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한테도 꼭 들려주어야 할 삶의 지혜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러운 눈을 가지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아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가지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그들을 사랑할 차례입니다.”--오드리 헵번     


                        <글 :  홍지화/ 소설가>



< 무단 도용, 표절  등 저작권 침해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한 법적 책임을 묻겠습니다. >>


#만인의연인.  #오드리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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