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쫀쿠가 되자고!
한 해를 마감하며 팀장 T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2년 전 그가 회사 발령을 받은 뒤 첫 번째로 한 것은 열다섯 명의 팀원들과 갖는 개별 티타임이었다. 커피 음료를 사이에 두고 열다섯 번의 만남을 해내는 T를 보고 퍽 바람직하다 생각했는데 그냥 보여주기식 액션이었나.
연말 성과 평가를 하는 적정 시기에 자리가 마련될 거라 기대했으나 기다려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
너무 무겁지는 않되 진정성 있는 대화가 오고 가길 바란 나.
보고서 품의에 담긴 내용 외에 T와 눈을 보고 말하는 시간을 원했다. 조직의 방향과 나의 역할에 대해 정리한 생각들을 점검받는 자리가 필요했다. 어쩌면 켜켜이 쌓아낸 야근 시간과 성과에 대한 귀여운 위로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작년 말 꼬박 사무실에서 보낸 밤의 시간들은 자발적 고립이었으나 성취감은 더 컸다. 공들이고 애쓴 만큼 돌아오는 모양은 보기 좋게 다듬어져 꽤 만족스러운 형태였다. 그 시간들의 보상으로 T와 마주 앉아 새로운 밥상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1월 30일 금요일 오전 7시
대표 O와 팀장 T만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고요한 시간, 엄청난 용기를 내어 그 앞에 섰다.
"팀장님,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어? 어어.. 괜찮아"
"저랑 이따가 커피 한잔 하러 가실래요?"
"커피? 응~ 그래"
"네~ 여기(11층 사내카페 休) 말고 지하에 카페에서요."
"아, 지하로? 이 시간에 문을 여나?"
"네~ 7시 30분에 문 열어요. 한 35분쯤 가시죠"
"알겠어"
접촉 고민을 끝낸 후 자리로 돌아와 스펀지로 볼을 두드렸다. T와 마주할 준비가 시작됐다.
'아, 무슨 말을 먼저 꺼내지.'
허락된 시간을 무조건 잘 활용해야 한다. 지피티군과의 최근 대화 내용을 다시 살폈다. 며칠 동안 빼곡하게 써둔 빨간 노트를 계속 읽어내리니 마음이 다듬어졌다.
사내 카페가 생긴 후 오랜만에 방문한 지하(구. 단골) 카페의 첫 손님으로 입장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카페 사장님과의 눈인사도 잠시, 성격 급한 T의 본심이 튀어나왔다.
"뭐야. 무섭게.."
"아~ 팀장님, 별건 아니고요. 그냥 오랜만에 팀장님이랑 커피 마시고 싶어서요~
올해 추진과제 작성 중인데 제가 생각하는 방향이 맞는지 조언도 구하고요."
"아 그런 거야? 하하하하"
나의 웃음을 본 후에야 그는 안도한 듯했다.
사실 회사 다니면서 커피 한잔 제안은 대부분 유쾌한 기억이 아닐 테니 말이다.
컵에 담긴 커피가 사라지는 한 시간 동안 꽤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내가 앉은 앞쪽으로 반쯤 기울어진 T의 상체는 나를 무장 해제 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음의 빗장이 사라진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카스텔라 말고 두쫀쿠가 되자고! “
(구하기도 어렵고 대체 불가능, 겉과 속이 단단하고 가득 찬, 베어 물면 극락으로 가는 그런 거)
<내 침묵은 나를 지켜준 적이 없습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브런치에서 발견된 문구. 지난 몇 년 간의 나를 잘 들여다본 누군가가 명쾌하게 한 줄로 정리해 준 듯하다. 그렇다. 침묵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혼자 다 해내면 고스란히 내가 떠맡게 된다. 묵묵하게 일을 잘하면 혼자 해도 괜찮구나 판단한다. 자뻑하며 지나온 날들을 모조리 반성한다. 여긴 회사인데 혼자 취해 있었다. 앞으로 안 하던 생색내기를 부지런히 할 것이다. 말을 하고 표현을 해야 듣는 시늉이라도 하며 반응할 테니까, 진짜 나도 쫌 적당히만 하자!
팀장 T와 함께한 용기 낸 티타임은 침묵을 깨는 첫 번째 망치인 셈이다.
[별첨]
지난 주말, 오랜만에 만난 자칭 T를 씹어 먹는 친구 G가 이렇게 말하며 흥분했다. “야. 그렇게까지 다 하지 마. 너도 개네랑 똑같이 딱 그만큼만 해. 나도 요즘에는 안 하던 생색 엄청 내고 있어. 이거 누가 다 한 줄 아세요? 다~ 제가 했어요. 진짜 힘들었겠죠?ㅋㅋ“라고.
똑쟁이 박사 G의 말이 귀에 계속 대롱대롱 달려 있다.
“아무 쓸데없어야~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나가서 네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