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고 묻는다면
단유를 했다
3개월간의 혼합수유를 마치고 나는 단유를 했다. 사실 단유를 '했다'는 표현은 어색하다. 젖이 많지 않은 편이었기에 나는 젖을 물리지 않고, 아이는 모유를 먹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단유가 되었다. 단유를 계획하고 한 달만에 젖이 말랐고, 남아있는 젖이 뭉쳐 유선을 막을 경우 다음 임신에 젖몸살이 심하게 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단유 마사지만 추가로 받았다. 다음 임신이 있을지는 아직 모를 일이지만.
단유를 결심하기까지 몇 주를 망설였다. 아이가 젖을 빠는 모습을 보면 이 감각과 이 감정을 언제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싶어 한 달만 더, 몇 주만 더 해볼까 싶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남편에게 '단유 할까, 언제 할까' 물었다. 남편은 언제든 단유에 대해 결심이 서면 내가 임신 초부터 내내 노래를 불렀던 광어회에 시원한 맥주를 준비해주겠다고 했다. 남편은 나의 단유에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럼에도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단유 해도 될까?'
처음 모유 수유를 시작할 때는 아이의 유치가 나는 6개월쯤까지 모유를 먹이겠다 막연히 생각했다. 모유 수유를 하면서 나만 볼 수 있었던 아이의 표정, 위아래로 입을 최대한 벌리고 젖을 문 입술의 모양, 아이의 따뜻한 손바닥이 내 가슴 위에 살포시 얹어지는 느낌은 나에게 모유 수유의 기쁨을 알게 했다. 하지만 아이는 신생아기를 지나며 등 대고 자기를 거부하는 동시에 수유쿠션도 거부하기 시작했다. 모유수유를 하는 동안 오롯이 내 두 팔로 아이를 안아 들어야 했다. 젖병으로 먹을 때와는 달리 가슴을 물리면 30분이고, 40분이고 놓아주지 않는 덕에 임신 전부터 말썽이었던 목디스크는 점점 날개뼈와 팔꿈치에 저릿한 느낌으로 경고를 보내왔다. 그럼에도 나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단유 해도 될까?'
아이를 낳고 3개월, 몸이 축난다는 말을 실감했다. 아이는 점점 더 많이 먹고 싶어 하는데 모유는 확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모유 수유를 한 뒤에도 배가 차지 않아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분유로 보충을 해주다 보니 해야 하는 일은 두 배 이상 늘어났다. 모유 수유를 하고 있음에도 수유 때면 매번 젖병과 젖꼭지가 나왔다. 모유량을 늘리기 위해 모유 수유 후면 짧게라도 꼭 유축을 했다. 당연히 유축할 때 사용하는 깔때기와 젖병도 설거지 감으로 추가되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단유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나는 단유를 결심했고, 한 달에 걸쳐 단유를 했다. 이제 수유는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남편과 엄마, 아빠가 한 번씩 아이를 안고 젖병을 물렸다. 새벽에 잘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늘어났다. 유축을 멈추며 설거지가 줄었다. 편두통이 줄었다. 디스크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단유에 성공했다.
'왜?'
"커피 마셔도 돼?"
"응, 나 단유 했어.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실래."
"단유 했어? 왜?"
"아기 분유 먹이는 거니?"
"네, 저 단유 했어요."
"왜? 벌써 젖이 말랐니?"
단유 후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왜'냐는 물음이었다. 이 물음은 괜히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내가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질책인 것 같았다. 그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설명이 아닌 변명을 하는 입장이 되었다. 목디스크가 심해졌다고, 몸이 안 좋았다고, 젖이 충분하지 않아 아이가 힘들어했다고.
비단 어른들만 단유에 대해 묻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절친한 친구들도 단유 소식에 자연스럽게 '왜'인지 이유를 먼저 묻곤 했다. 사실 나는 이런 질문을 받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토록 반복적으로 나에게 물었다. 지금 단유를 해야 할지.
어쩌면 정말 궁금해서 물었을지도 모르는 그 질문에 위축이 된 건 모유를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단유를 선택한 내가 나쁜 엄마는 아닐까, 내 마음속 깊이 숨어있던 죄책감 때문이었다. 모유가 좋다는 이야기는 이미 각종 매체를 통해 익히 들었다. 나의 아이에게 주는 것인데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나보다 강한 이가 있을까. 처음 맡는 낯선 향의 모유촉진차를 아침저녁으로 마시고, 한여름에도 뜨거운 미역국을 들이켰다. 마사지도 받아보고 병원에서 추천하는 약도 먹어보았다. 어쩌면 더 노력했다면 완모가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몸이 지친 새벽, 젖을 물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대체 언제까지 물고 있을 거야' 하며 불쑥 성이 났다. 피곤과 피로가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덮어버렸다. 손가락 끝까지 전해져 오는 저릿한 통증이 아이 등을 토닥이는 손에 신경질을 실었다. 다음날 아침 평온한 표정으로 잠든 아이를 보며 미안함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의 통통한 배에 코를 박고 결심했다. 단유 하자.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단유에 대해 알아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모유가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를 배웠다. 그럼에도 단유를 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만 단유에 대한 죄책감이 덜어질 것만 같았다. (브런치 키워드에도 '모유수유'는 있지만 '단유'는 없다.) 누가 묻기도 전부터 나는 단유 해야만 하는 이유를 하나 둘 준비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질문을 받았을 때는 술술 준비한 대답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내 마음에 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단유에 이유가 필요한가? 이유 없이 단유를 하면 나쁜 엄마인가? 모유 수유를 해야 좋은 엄마인가? 모유 수유를 하지 않으면 아이에게 미안해야 하는가?
나는 단유를 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더 사랑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아이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한 결정이었다. 무엇을 '위하지' 않더라도 단유가 '나쁜 결정'은 아니다.
다른 글보다도 훨씬 오랜 시간 생각을 정리하고 이 글을 썼다. 마음 한편에 밀어두었던 내 안의 미안함과 죄책감이 글을 엉키게 만들었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지우기만 여러 번.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는 남편의 품에 안겨서 젖병을 빨고 있었다. 아이는 남편과 눈을 마주 보며 아주 씩씩하게 젖병을 비워냈다. '꺽-'하는 우렁찬 트림 소리를 들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의 만족스러운 표정과 그동안은 나의 전유물이었던, 젖 먹이는 일을 나눠 가진 남편의 행복한 표정을 보니 아직까지 얹혀있던 미안함이 아이의 트림과 함께 소화되었다.
누군가 혹시 한 달 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망설이고 고민하고 있다면 이 짧은 글이 그 마음에 작은 응원과 지지가 되었으면 한다. 아이에게 물을 수도, 아이에게 대답을 들을 수도 없어 답답하고 속상할 엄마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엄마의 결정에 나쁜 결정은 없을 것이다. 모든 결정의 순간에 아이를 사랑하고 있을 테니까. 꼭 반박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야 옳은 결정은 아니다.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고민하고 망설인 그 마음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니까.
다만 아이의 마음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이가 말해준다면 더 좋겠다.
"엄마, 괜찮아. 잘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