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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어제 Jan 17. 2022

저기요, 애기 엄마

평생 부르기만 하던 '엄마'가 되었다.

저기요, 애기 엄마


 낯선 사람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나의 나이와 상황에 따라 변해왔다. 어릴 때는 '얘야', '학생'이라는 호칭이 나를 불러 세웠다. 스무 살이 갓 넘어 화장하고 구두를 신으며 나름대로 가꾸기 시작하던 시기에는 '아가씨'라는 호칭에 홀로 뿌듯하기도 했다. 그땐 그 말이 나를 더 이상 어린 학생이 아닌 여자 어른으로 대우하는 듯 느껴졌다.


 최근 몇 년은 급격하게 다양한 호칭을 경험하는 시기였다. 결혼을 준비하며 나는 '신부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처음 '신부님'이라고 불렸을 때는 세상 그렇게 어색하고 낯간지러울 수가 없었는데, 웨딩박람회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마치 오랫동안 들어온 호칭처럼 익숙해졌다.


 산부인과에서 아기집을 확인하는 순간부터는 '산모님'으로 불렸다. 처음 알았다. 병원에 가도 '환자분'이 아닌 다른 호칭으로도 불릴 수 있구나. 임신으로 배가 나오면서는 '애기 엄마'로 불리기 시작했다. 엄마라니. 처음 애기 엄마라고 불리던 순간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일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집 근처 슈퍼에서 우유와 빵을 사서 들고 나오던 길, 한 아주머니께서 옆으로 다가와 "애기 엄마, 여기 시장이 어디에 있어요?"라고 물으셨다. 그 동네에서는 시장에 갈 일이 없기도 했고, 처음 들어보는 '애기 엄마'라는 호칭에 너무 당황해 '시장'이라는 말을 태어나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어버버 대답을 뭉갰었다.


 '애기 엄마'라는 호칭은 길가던 어린아이들이 '아줌마'라고 불렀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학생, 아가씨, 신부, 산모와 달리 '아기'의 '엄마'로 불린다는 것은 아기와 내가 공동운명체가 된 듯 당황스러운 부담감이 얹어졌다. 무엇보다 내가 항상 찾고 부르던 '엄마'로, 내가 불린다는 것이 가장 당황스러웠다. 엄마는 엄마인데, 나는 엄마가 아닌데.



 너무나 익숙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그 단어, 엄마.

 

 항상 내가 찾았던, 불렀던 호칭이 이제 나를 향한다. 나는 엄마를 어떻게 불렀더라. 엄마는 내게 항상 엄마였고 놀랄 때, 무서울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나의 믿을 구석이었다. "엄마! 엄마야!"


 내가 부를 때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어색함 때문에 한동안은 '애기 엄마'라는 호칭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 스스로 나를 '엄마'라 부른다. "아가야, 엄마야." 아이는 알아듣지도 못할 시기부터 꾸준히 내가 너의 '엄마'라 알려준다. "엄마가 해줄까? 엄마랑 잘까?" 낯선 친척과의 만남에 당황하여 입술을 삐죽거리는 아이를 어르며 이야기한다. "여기 엄마야, 엄마."


 엄마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와 무게를 이제 겨우 몇 달이나 느꼈을까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이지만 나는 엄마가 되었고,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젠 아이를 향해 "아가야, 할머니야."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나의 엄마를 바라본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고, 두 아이를 낳고 키운 나의 엄마. 나는 엄마의 젊음을 하루하루 양분 삼아 자랐다. 언제부터였을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우리 엄마가 아니라 TV에 나온 연예인이 되었던 날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요리사였고, 모르는 게 없던 나의 전지전능했던 엄마가 온라인 뱅킹 앞에 버벅거리고 키오스크를 무서워하게 된 날은 언제부터였을까.


 나의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를 사랑하게 될수록, 나는 엄마 앞에 죄인이 된다. 이렇게 나를 사랑한 존재에게 나는 종종 짜증을 냈고, 성을 냈고, 어쩌면 가끔은 귀찮음을 느끼기도 했다. 몇 달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나를 먹이고 재웠던 엄마에게, 본인은 몇 년 동안 같은 옷을 교복처럼 입으면서도 나와 내 동생에게는 철마다 영양제와 보약까지 챙겨 먹였던 엄마에게, 나의 엄마에게 나는 시간이 갈수록 미안함이 쌓인다.



 이제 엄마는 또 나의 엄마라는 이유로, 나의 엄마라는 죄로, 나의 아이를 함께 키우기 위해 나와 함께 산다. 우리는 공동육아를 한다. 아니, 사실은 엄마가 나와 내 아이까지 2대를 양육하고 있다. 엄마가 되어가는 중인 엄마의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를 키우며 엄마는 오늘도 하루 더 나이 먹어가고 있다. 나는 언제까지 엄마의 가장 젊은 날을 빌려 나를 채우는 걸까.


 미안해, 나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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