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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ki Lee Oct 08. 2022

곶감 기억

이제 곶감을 만들 시기가 다가온다


작년 이맘때쯤의 일이다. 밀양 가는 길에 청도를 거쳤다. 청도천 옆 25번 국도는 한적했다. 호젓한 여행길에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달린 노변의 과수원이 정겨웠다. 시월 초인데도 남쪽이라 감이 빨리 익는 것 같았다. 청도는 씨 없는 반시가 유명한 고장이다.


감을 직거래하는 매장이 보여 차를 세웠다. 매장 구석에는 아직 홍시로 만들지 않은 생감도 있었다. 단단하고 색이 잘 난 것이 곶감 만들기에 제격일 것 같았다. 플라스틱 상자에 가득 담긴 생감 한 상자를 사서 트렁크에 실었다.


해마다 곶감을 만든다. 곶감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나, 감을 깎아서 처마 밑에 매달면서 가을이 왔음을 느낄 수 있어서다. 지나가는 바람에 곶감 줄이 살랑거리는 모습에 덩덜아 마음이 풍성해진다. 재미로 몇 년 만들다 보니 이제는 가을을 맞이하는 우리 집의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감은 인터넷에서 사기도 하고 여행길에서 구하기도 한다. 올해는 청도반시로 곶감을 만들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함께 곶감 작업을 시작했다. 해마다 하는 일이라 손발이 척척 맞는다. 아내가 껍질을 깎으면 나는 그것을 곶감 걸이에 하나씩 꽂아 다락방 처마 밑에 가지런히 내건다. 스무 개씩 일곱 줄. 채 두 시간이 되지 않아 한 상자의 곶감 작업을 모두 마쳤다. 줄줄이 달린 주황색 감이 색이 진해진 백일홍과 어우러져 통창 너머로 가을을 그렸다.

어닝 아래에 감을 깎아 줄줄이 매달았다


가을답지 않은 날씨가 연속되었다. 삼십 도에 육박하는 늦더위가 이틀, 그리고 이어지는 가을비. 걸어놓은 감이 걱정되어 살펴본다. 아직 딱딱해야 할 감이 며칠 만에 물렁물렁해졌다. 하나를 빼서 입에 넣어 보니 신맛이 돈다. 곶감이 아니라 감식초가 되어가는 중이다. 첫날 까만 점이 몇 개 보였는데 며칠 만에 감 전체로 곰팡이가 번지고 있다. 몇 개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원래 곶감은 첫서리 내리는 상강쯤에 만들어야 해요.” 옆집 아저씨가 찾아와 웃는다. 



국내 원자력 발전소의 제어 분야 기술 책임자로 오랫동안 일했다. 고장으로 발전소가 정지되거나 기술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전문가로 팀을 꾸려 지원하는 역할이다. 발전소가 하루만 정지되어도 십억 원 이상의 매출 손실을 본다. 해결하지 못해 몇 달 동안 발전소를 세워 둘 때도 있었다. 항상 빨리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설비를 상대하는 일이라 밤을 낮 삼아 일하다 보면 길이 보였다. 쓸 수 있는 자원을 모두 투입해서 빠르게 결과를 만들어 내는 습관이 생겼다.


8년 전 옥상 테라스가 있는 집으로 이사와 정원을 꾸몄다. 첫해부터 꽃이 풍성한 정원을 빨리 보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삼월 초에 꽃으로 유명한 고양시까지 가서 모종을 사 와 화분에 심었다. 추위에 강하다는 줄리아, 팬지, 페츄니아 등. 하지만 곧 찾아온 꽃샘추위에 모두 얼어 죽고 말았다. 텃밭을 시작할 때도 사월 중순에 고추 모종을 심어 모두 죽인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자연에 버거움을 느꼈지만, 결과를 빨리 보고 싶은 조급함은 반복된다. 어느덧 몸에 깊게 배어 천성처럼 자리 잡았나 보다.


곶감이 되어가는 가을 옥상 정원은 풍요롭다.


날씨만 도와준다면 시월 초에 곶감을 만든다 해도 큰 문제는 없다. 곶감을 일찍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한 적이 있다. 감의 예쁜 자태에 마음을 빼앗겼고 곶감을 빨리 만들고 싶은 욕심에 서둘렀는데 올해는 결과가 좋지 않다. 자연을 상대로 하는 일이 어찌 사람의 생각대로 작동하는 기계의 일과 같을 수 있을까. 



곶감은 서늘한 공기와 바람이 만든다. 사람이 잠시 감을 깎아 내걸어 두면 바람이 몇 달간 열심히 일해 수분을 날리고 단맛을 끌어올린다. 바싹 마른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른 동짓달 곶감은 자연의 수고와 기다림의 결과다. 때를 정하고 감을 깎는 것은 바람의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당연히 자연과 상의해야 함에도 ‘내 맘대로’가 익숙한 나는 부족한 소견으로 때를 정하고 결실을 재촉한다. 곶감을 내가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상한 감을 모두 빼서 쓰레기 봉지에 담았다. 사실 봉지에 담겨야 할 것은 감이 아니라 나의 조급함과 교만일지도 모른다. 더 나이가 들어야 삶의 여유가 생기고 기다림에 익숙해질까. 달력에 곶감 만드는 시기를 메모해 두었다. 


올해 상강은 10월 23일이다. 그때쯤 오일장이 열리는 날을 잡아 청도 시장에 갈 예정이다. 감을 깎아 널면서 또 한 번의 가을이 지나가는 아쉬움을 달래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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