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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기 - 어린 시절의 추억

by 더불어 사는 사회

어렸을 적, 새로 이사간 동네는 그리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언덕 위에 위치한 마을이라 집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집만 나오면 항상 만날 수 있는 아이들, 그들과 노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때론 혼자서 동네 뒷산에 올라가 오솔길을 따라 걷는 것도 좋아하였다. 높은 산은 아니고 얕은 능선으로 길게 이어진 나지막한 산이었는데 그 산을 넘어 아파트가 보이는 곳까지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멀리서 바라보며 가고는 싶었는데 혼자서는 무서워 가지 못하고 도로 내려오곤 하였던 아련한 기억 속의 마을들.. 지금도 눈 감으면 아득히 떠오르는 영상들 어린시절 나만의 공간이자 추억이 베어있는 곳이다..


봄이 되면 동네 한 길에선 축구가 많이 벌어졌다.

대략 10명 정도 모여 축구를 하였는데 축구를 하는 날이면 옷이 모래에 뿌옇게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물론 우리 편이 이겼을 땐 이까짓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쁨에 들떠서 엄마의 꾸지람 소리도 기분이 좋게 느껴졌다.

밤에 잘 때는 나의 플레이를 상상하면서 내일은 멋진 골을 넣으리라 다짐하며 잠이 들었다. 축구가 조금 싫증나면 동네 위에 위치한 공터에 모여 야구를 하였다.

공은 형편없이 날아와 볼이거나 데드볼 투성이었지만 야구 선수들 처럼 폼을 잡아 공을 던지고 점수를 내는 기쁨에 야구를 하였다. 어쩌다 안타를 칠라 치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내가 저 강속구를 치다니 다음엔 홈런을 날릴 거야’ 라고 다짐하지만 다음 타석땐 여지없이 삼진이었다.
욕심이란 가져선 안된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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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푸르름이 짙어가고 매미 소리에 귀가 따가운 여름이 오면 우리는 냇물과 강으로 자주 놀러 다녔다.

족대와 빈 깡통을 하나씩 들고 동네 아이들은 냇가로 향했다.

한명이 족대를 받치고 두명은 저 위로 올라가 고기를 몰았다. 부푼 기대를 품고 들어올린 족대엔 새끼 손가락만한 참붕어, 미꾸라지 등이 있었고 가끔씩 월척으로 손바닥 만한 붕어가 잡혔다. 그리고 지금은 보기 힘든 물방개, 장구아비 등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잡은 물고기들은 집으로 가져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도로 살려 주었다. 자유를 바라는 우리들 심정처럼 다시는 우리와 같은 낚시꾼에게 잡히지 말 것을 기원하면서 말이다.


장마가 시작되면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만 빼고는 항상 모여서 하는 놀이가 있었다. 바로 댐쌓기.

실처럼 가는 물줄기를 맨 먼저 한 사람이 막으면 그 밑에 한사람이 또 막고, 또 그 밑에 한사람이 막으면 이내 근사하게 이어진 댐이 완성된다.

우리는 어린 마음에도 댐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온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고 물이 넘칠 것 같으면 옆으로 물줄기를 내어 뒷 사람에게 흘려보냈다.

동네 어른들이 지나다니면서 웃는다. 그래도 우리는 그 놀이가 마냥 좋았다.

마치 최고의 댐 건설자가 된 것처럼..
그러나 그 다음날에 가보면 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다.

주변의 쌓인 흙들만이 간 밤에 댐이 무너졌음을 말해 준다.

우리의 온 정성이 들어갔었지만 우린 별로 아깝지 않았다.

물에 담은 우리의 소망도 멀리멀리 흘러갔을거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또 댐을 쌓았다...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면, 아이들은 동네 뒷산에 자주 올라갔다.
200원짜리 과자가 그립던 때 그곳에 가면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탐스럽게 돋아있는 산딸기를 따먹고, 도깨비 방망이에 나오는 개암을 깨서 먹을 때는 그 어떤 과자 보다도 맛이 있었다.

호두껍질처럼 단단한 개암 껍질을 벗겨 주머니에 넣은 다음 소중하게 보관하여 동네에 내려와서도 먹고, 가족들에게 자랑도 했다. 이거 내가 몇시간에 걸쳐 딴 거라고 하면서..
산은 그렇게 우리의 휴식처이자 식량의 보고 였다.


가을이 짙어가면서 우린, 걸어서 한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가재 잡으러 잘도 걸어다녔다. 워낙 깨끗한 물에서 사는 가재는 그만큼 보기 힘든 동물이라 아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돌을 들췄을 때 꼬리를 치며 달아나려는 가재를 우리는 쉽게 잡았다. 제법 큰 놈에게 물렸을 땐 아프기도 했지만 가재를 잡았다는 생각에 아픔은 잠시였다.

잡은 가재를 집에서 키우려고 모두 집으로 가져왔지만 한명도 일주일을 넘게 살았다는 아이는 없었다.

아무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도 그것이 자연이 아닌 이상 생물의 서식처가 될 수 없는 가 보다.
그렇게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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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면 우리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놀이는 뭐니뭐니 해도 '눈깨뜨리기'였다.
우선 눈을 주먹만하게 꽁꽁 뭉친다. 손으로 꽉꽉 누르고 문질러서 조금 단단해지면 그 위에 눈을 덧붙인다.
그리고 이번엔 벽 같은 데다 조금씩 힘을 줘가며 문 덴 다음 어느정도 딱딱해지면 그 위에 또 눈을 덧붙인다.

그러면 이제 아까보다 더 단단해졌으므로 더 센 힘으로 벽에다 문데어 눈을 입히고, 또 이젠 밟고 올라서서 문지르는 등 이런 과정을 수십번 반복하면 처음의 눈덩이는 어느덧 수박통 처럼 커진다.

이렇게 적당한 크기의 눈덩이가 완성되면 우리는 공터에 모여 한 사람은 자기 눈덩이를 밑에 놓고 또 한사람은 위에서 떨겨 이를 어느 하나가 깨질 때까지 번갈아 가면서 계속 내리쳤다.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었건만 보통 한 10번 정도만 내리치면 깨졌다.

이렇게 하여 동네 왕을 가렸는데, 아이들은 모두 추위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각자 최고의 눈덩이를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동네 왕이 된 아이는 자기 눈덩이를 집 뒤뜰에다 잘 보관하면서 다음날 다른 아이가 도전해오면 또 눈깨뜨리기를 하고, 새로 왕이 된 아이는 또다른 아이의 도전을 받기 위해 자기 눈덩이를 고이고이 겨울 내내 간직하였다.
어렸을 적, 이 눈덩이는 단단하고 덜 단단하고를 떠나 우리 각자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어린 시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딱지와 구슬 이상이었던 것이다.

겨울이 지나 금방 녹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우린 눈덩이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눈덩이가 1년 내내 녹지 않고 그 다음해에도 잘 싸워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눈은 녹을 걸 알았기에 우리는 다음 해를 기약하며 아쉬워 하면서도 얼른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은 어느 계절보다도 빨리 지나가 버렸다.,


멀리서 바라만 보고 한번도 가보지 못한 산과 강과 들, 무지개가 선다는 늪.. 이 모든 추억들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소년들은 이제 인생의 희비애환과 이비(理非)를 아는 나이를 먹어 버렸다.



저서 - 1) NLP 심리치료 및 상담

2) 정서행동장애 학생 심리치료 및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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