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원래 경제학을 전공하였습니다. 대학 진학 때 뚜렷한 철학이 없이 성적에 맞춰서 선생님이 권하시는대로 경제학과로의 진학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때는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하면 원하는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꿈도 없이 졸업하면 단순히 대기업에 취직해서 적당히 돈을 벌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후 처음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단순히 기업체에 취직해서 돈 벌며 사는 것인가?’를 물어보았을 때 왠지 조직의 한 부품이 되어 바쁜 삶에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삶을 살 것만 같았습니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은 보람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제대 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미래의 삶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을 때,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어른들과 얘기하기보다는 나보다 어린 사촌 동생들과 얘기하고 노는 것이 더 편하고 좋았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졸업하고 나서도 그랬습니다.
그땐 막연하게 ‘내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러는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제대 후 생각해보니 나의 그런 성향이 어쩌면 교직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3학년 복학하는 대신 과감하게 ‘재수할까?’라고도 생각했지만, 친구 및 가족의 만류와 지금까지 공부한 것이 아깝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 안 그럴 거라는 자기 위안 속에 시간은 흘러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경제연구원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연구원에서 일하는 동안은 정말 재밌었습니다. 연구 과제를 수행하는 박사님들을 보조하며 경제학적 지식을 넓힐 수 있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일도 별로 많지 않아 공부 등 자기 개발할 시간이 충분했습니다. 마음 한 편에는 교직에 대한 갈망이 조금 남아있었지만, 연구직 또한 내 적성에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곳에 정식으로 취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석사 학위가 있어야 하기에 경제학 석사과정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마침 제가 일했던 경제연구원에서 공채가 있었고 몇 년 전 일했던 인연과 교수님의 추천서 등으로 정말 운 좋게도 정식 연구원으로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 일하면서 느꼈던 여러 추억들이 떠오르고 이제는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정규직으로 입사하며 느꼈던 감정은 계약직으로 일했을 때랑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그때는 피상적으로 연구원을 이해했다면 이제는 실질적으로 과제 책임자가 되어 연구를 수행해야 하고 무한 책임이 뒤따라 왔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연구 실적을 드높이기 위한 조직 문화가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였습니다. 어렵게 취업 관문을 뚫고 들어왔지만 예전 같은 보람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조직의 이익이 우선이냐 아니면 사람에 대한 배려가 먼저냐는 항상 직장 생활을 하며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열이면 열 조직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연구원 문화는 사람들을 일일이 배려하기보다는 연구 성과를 높이기 위해 조직을 우선시하고 사람을 기계 부품처럼 다루었지만, 저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우선시 되어야 조직이 잘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에 나름 재미를 붙이도록 노력도 해보았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공부방 자원봉사도 해보았고, 크리스마스에는 몇몇 연구원 사람들과 불우한 아동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몰래 산타 활동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 속에서는 ‘이게 내가 갈 길이 아니다.‘는 외침이 계속되었고,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것이 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옛날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일에 만족하지 못하면 자꾸 다른 생각이 드는 것처럼 늦었지만 이제라도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서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렸을 땐 다들 순수했을 텐데...‘ 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보았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현실적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교직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은 나날이 커져 갔습니다.
6년째 연구원을 다니면서 무엇이 올바른 삶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하였습니다. 적지 않은 월급과 부모님의 기대, 현재의 나이, 이제 곧 결혼도 해야 한다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한다면 연구원을 계속 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의 양심을 거스르며 퇴임할 때까지 잘 다닐 수 있을까?‘, ’물질적으로 조금 더 풍요로운 삶이 될 수는 있어도 이것이 과연 보람있는 삶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해 보았을 땐 한시라도 빨리 연구원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이젠 정말로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이상을 쫓을 것인지 그냥 현실에 타협할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때 어렸을 적 추억 하나가 불쑥 떠올랐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강원도 시골에서 자라 산과 들판, 냇가를 뛰어다니며 즐거웠던 추억이 참 많습니다. 그 중 ’눈 깨뜨리기‘라는 놀이가 생각났습니다. 겨울철 친구들과 했던 놀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놀이는 뭐니뭐니 해도 ’눈 깨뜨리기‘ 였습니다.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면 눈 깨뜨리기 놀이는 친구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놀이였습니다.
우선 눈을 주먹만하게 꽁꽁 뭉칩니다. 그리고 이것을 손으로 꽉꽉 누르고 문질러서 조금 단단해지면 그 위에 눈을 덧붙입니다. 그리고 이번엔 이 눈덩이를 벽 같은 데다 조금씩 힘을 줘가며 문 덴 다음 어느 정도 딱딱해지면 그 위에 또 눈을 덧붙입니다. 이렇게 눈을 덧붙이고 딱딱한 데다 문지르고 또 눈을 덧붙이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처음의 눈덩이는 어느덧 수박통처럼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수박통 만한 눈덩이가 완성되면 우리는 공터에 모여 한 사람은 자기 눈덩이를 밑에 놓고 또 한 사람은 위에서 떨어뜨려 이를 어느 하나가 깨질 때까지 번갈아 가면서 계속 내리쳤습니다.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었건만 보통 한 10번 정도만 내리치면 어느 한 쪽이 깨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여 동네 왕을 가렸는데, 아이들은 모두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 최고의 눈덩이를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동네 왕이 된 아이는 자기 눈덩이를 집 뒤 뜰에다 잘 보관하면서 다음 날 다른 아이가 도전해오면 또 눈 깨뜨리기를 하고, 새로 왕이 된 아이는 또 다른 아이의 도전을 받기 위해 자기 눈덩이를 고이고이 겨울 내내 간직하였습니다.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minizzoa/221811313478)
어렸을 적 이 눈덩이는 단단하고 덜 단단하고를 떠나 우리 각자의 소중한 보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딱지와 구슬 그 이상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눈덩이가 동네 아이들을 모두 무찌르고 최고가 되어 왕이 되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해보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큼 튼튼한 눈덩이를 만들기 위해 매일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전력을 다하였고, 단단한 눈덩이를 만든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설레었습니다.
겨울이 지나 눈이 금방 녹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우린 눈덩이를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눈덩이가 1년 내내 녹지 않고 그 다음 해에도 잘 싸워주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눈이 녹을 걸 알았기에 우리는 다음 해를 기약하며 아쉬워하면서도 얼른 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겨울을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가는 겨울과 깔끔하게 이별하는 법도 알았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전 결심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계속 안주하게 되면 영혼의 발전도 없고 계속 후회만 남을 것 같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느냐 이지, 더 이상 사람들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결심을 더 이상 미룰 것이 없었습니다.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것보다는 어렸을 때처럼 가슴 뛰는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좋은 직장을 다니는 것이 아닌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슴 설레는 일을 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삶임을 깨달았습니다.
6년간의 고민에 마침표를 찍고 나니 마음은 매우 홀가분해 졌습니다. ‘더 빨리 결단을 내렸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지만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르다.’라는 말처럼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렸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다만 첫째 아이가 태어난 상황이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부담감이 마음을 다시 사로잡기 시작하였습니다.
연구원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비로소 선생님이 되기 위한 방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학교 다니는 동안에 교직이수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새롭게 사범대를 들어가거나 관련 대학원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석사까지 경제학을 전공한 터라 교사자격증을 따기 위해 대학원으로 진학한다면 일반사회교육을 전공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반사회 교과로의 임용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새롭게 도전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인생의 모험을 거는 것인데 일반사회 교과로 임용을 쳐서 과연 붙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과목을 알아보던 중 정말 우연하게도 특수교육과를 알게 되었습니다. 특수교육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고 막연하게 장애아동에 대한 교육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때 특수교육과를 알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운명이었습니다.
우연히 특수교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일반교사가 되는 것도 보람이 있겠지만 좀 더 희생정신이 필요하고 교사의 사랑이 절실한 장애 아이들을 돌보는 특수교사가 저의 적성에 훨씬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드디어 결단을 내리고 연구원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특수교육과에 편입을 하였고 3년이 지난 후 마침내 특수교사로서의 꿈을 거의 40년 만에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저서 - 1) NLP 심리치료 및 상담
2) 정서행동장애 학생 심리치료 및 상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