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수많은 TV 프로그램 중에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마음 속에 가로새겨진 한 장면이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장면도 아니고 어찌보면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그런 평범한 장면인데도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이상하리만치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아마도 ‘향수’란 단어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제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재밌게 보았던 만화 중에 ‘모래요정 바람돌이’라고 있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엔 누구나 다 하늘을 한번쯤 날고 싶고 신기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 합니다. 특히 잠자리에서 하늘을 날거나 요술사 또는 투명인간이 되어 모든 일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꿈이라도 꾸는 날엔 ‘아, 실제로 정말 하늘을 날아다니고 요술을 뿅뿅 부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그리고 잠시나마 꿈속에서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뒤로하고 현실 속에 원래의 나를 발견하고는 무척 아쉬워했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보았던, ‘모래요정 바람돌이’는 바로 이러한 아이들의 동심의 세계를 실현시켜주고 꿈속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실제로 바람돌이가 실현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우리들은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었고 마음껏 희망과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만화에서 하늘을 날거나 투명인간이 되는 등 약간은 허무맹랑한 소원들에만 마음 깊이 공감했다면, 오늘날 저는 ‘모래요정 바람돌이’를 그냥 어린 시절 재밌게 보았던 만화 중에 하나였다 라고 밖에 생각 안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전 그 내용들을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유독 하나의 장면만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단순하게 비현실적인 소원 성취가 아니라, 다 큰 어른들에게도 어떤 아련함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날도 땅딸맞고 두더쥐같이 생긴 바람돌이가 어김없이 나타나 학생들의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한 여학생이 어렸을 때의 기억 중 잠재의식 속엔 굉장히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지만 현실 속 기억에선 거의 생각나지 않는 즉, 어렸을 때의 다시 기억하고픈 추억 하나를 떠올려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바람돌이는 그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해 주는 대신 앞으로 그 추억은 영원히 생각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아이는 어렸을 때의 잊혀져가는 아련한 추억 하나를 그래도 보고 싶어 바람돌이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자 잠시 후, 아이의 눈 앞에 펼쳐진 영상은, 바로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 자신의 머리를 곱게곱게 빗어주고 따스한 손길로 머리를 손질해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이는 그때 어머니 앞에 다소곳이 앉아 어머니에게 머리를 맡기고는 어머니가 머리를 곱게 빗어주실 때까지 즐겁게 얘기하고 편안함에 잠겼던 추억이 그제서야 생각났습니다.
정말 잊혀져가는 기억이었는데, 나이를 먹은 지금도 엄마의 다정한 손길을 다시한번 느껴보고 싶은데, 그땐 참 어머니 품이 따뜻하고 다정하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잊고 살고 있었구나를 소녀는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잊혀져가던 아련한 추억 속에서 아이는 잠시나마 정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꽤 오랫동안 방송됐었는데 오직 이 판 편의 내용만이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내 머리 속에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 자신이 과거 속 추억을 그리워하고 나도 그런 기억이 분명 있을 텐데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그러한 추억을 그리워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어렸을 적 추억이 ‘향수’를 느끼게 해주고 감정을 정화시켜주며,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 가슴깊이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추억은 매우 소중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어릴 때 기억이 악몽으로 다가오는 분들께는 정말 죄송한 얘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그때의 기억을 발판삼아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해 가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