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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막

생(生)에 대한 의지

by JINSOL

우울증의 대표 증상 중의 하나가 점차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아갈 의지를 놓는 것이다. 우울증의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이 병의 끝이라고 한다면 아마 스스로 하는 극단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우울증 증세 때문에 완전 무기력할 때보다는 오히려 회복기에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우울증이 너무 심하면 욕구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침대에 누워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멍하니 천장만 바라본다던가, 쉴 새 없이 SNS나 유튜브나 돌려본다던가. 하지만 조금 회복이 되고 살아 있음을 ‘감지’하게 되는 순간에, 즉 마비되어 있었던 감각이 조금은 깨어나 통각 즉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순간에. 극심한 고통이 겪게 된다면 그 때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극단적인 선택. 충동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많다고 학계가 말했다. (아, 덧붙여서 나는 의사가 아니고 전문적인 의학 지식을 가진 게 아니라는 점을 한 번 더 강조한다. )

‘대게는 그렇다.’이니까인데, 나는 이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나 스스로가 너무 의문스러워서였다. 우울증의 대표 증상은 나는 전부 겪고 있었다. 극단적 선택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크게 언급만 굳이 안 할 뿐 나도 우울증의 증상에 해당하는 건 모두 겪었으니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꽤 자주 했었다.


삶에 대해 어떠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도, 적극적으로 살고 싶다기보다는 ‘할 수만 있으면 편해지고 싶어!’였는데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그런 선택을 못 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지금까지 계속 그랬다. 결국 나는 선택하지 못하니까,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살아야 하는데 계속해서 괴로움과 고통이 몰려오니까. 그걸 치료하기 위해서 병원에 다녔던 거고 일련의 모든 행동을 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나는 그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됐다. 종교가 맞다 틀렸다는 지금, 이 이야기에서는 다룰 주제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극단적인 선택을 막아주고 있던 최후의 보루, 최전선이 파괴됐다.’라는 점이다.


최전선이 파괴됐고,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일’에서 ‘하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리자 나는 의문스러웠다.

어찌 보면 나는 내 선택에 완전한 자유를 얻은 셈이다. 모든 인생의 방향키가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속도도 방향도 내가 이끄는 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유에서 온 해방감을 느끼기보다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움이 더 컸다.


나는 매번 의문이 들었다.


‘이제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뭐지?’


맹세코 말하는 건데, 이건 인생을 비관하는 사람의 푸념 섞인 원망이 아니라 진짜 순수한 의문이었다.


나는 인생이란 게임에 갑자기 로그인된 캐릭터 같았다.

누가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어느 날 눈을 뜨니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외모, 환경, 가정—모든 설정은 정해져 있었다.


“태어난 건 내 의지가 아니잖아.”


그런데도 ‘살아야 한다’라는 명령만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었다. 살기 위해 해야 하는 모든 노동과 무게는 내가 짊어져야 했다.



하여튼 태어나버렸으니 이건 뭐 어쩔 수가 없고, 그럼 사는 건 사는 건데 뭘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가? 라는 의문이다. 내가 복잡하게 생각하면서 사는 걸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없으면 대체 오늘의 내 행동-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들-은, 그저 우연히 만나는 것들로 나열하면 되는 건가? 나야 원래 관계가 깊은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해서, 사랑해서,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있는 삶이 너무나 당연해서’ 살아 있다는 건 없다. 다시 말해 나는 관계가 깊은 사람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좋아하는 일? 글이야 습관적으로 쓰고 있지만, 이런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글을 써야 하나 싶다. 돈이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스트레스받아 가면서 일을 해내야 돈을 벌 수 있다.


내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게임이 ‘자동사냥’ 모드였다면 그냥 켜두면 될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소리다. 현재 나의 삶이란 에너지를 써야 유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 데다가 우울증이 덮쳐와서 내 머릿속 한구석에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이렇게 고통스러운 바엔 그냥 그만두는 게 낫다고 계속 외치고 있다.


문제는 이 지점이다. 그런 공허함이나 생각들이 몰려오면?

난 음식을 먹는다. 왜?

그 감정에서 달아나려고 말이다.

어머니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라고 표현했지만. 정말 한심한 일일까?


생각해 보면 ‘달아난다’라는 것 자체가 이미 생존을 위한 행위다. 극도의 공포감이나 위험이 몰려오니 그걸 해결하려는 수단이 폭식인 것이다. 미련해 보여도 한심해 보여도 제대로 된 자기조절 능력을 연습하지 못한 나로서는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가장 가까이 있는 소화기인 셈이다. 살기 싫다는 생각과 싸우기 위해 드는 작고 볼품없는 무기인 것이다.


나는 그걸 수년간 지속해 왔다. 그리고 제 발로 병원도 찾아가고 진료도 꾸준히 성실하게 받는다.


웃기는 노릇이다. 살려고 어떻게 해서든 살려고 발버둥 친다. 받지 못하는 사랑을 채우기 위해, 그러니까 그 애정이 결핍된 상태를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어린아이에게 애정 결핍은 곧 ‘죽음의 위기’다. 보살피는 사람이 없으면, 보호자가 없으면 배고픔을 해결해 줄 사람이 없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지켜줄 사람이 없다. 그건 ‘죽음’을 의미한다. 애정이 결핍된 상태는 곧 죽음이다. 나의 이 탁월한 생존 본능은 말한다. ‘애정 결핍 상태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해!’ 그래서 부지런히 부족한 애정을 채울 수 있는 활동들을 무의식적으로 해왔다.



이쯤 되면 나는 나의 생존 본능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희망 없는 목소리로, 나의 처지를 비난하면서 밤새 울어도 또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에 일어나 혹은 뜬눈으로 지새워서 다크서클이 가득 내려온 눈으로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3번의 환승을 하고서 출근으로만 1시간 30분이 되는 거리를 또 그렇게 꾸역꾸역 간다. 정말 나 스스로가 너무나 놀랍다. 그렇게 일을 하고 퇴근해서 또다시 3번의 환승 1시간 30분의 시간을 견딘다. 그러고 바로 집에 가느냐? 아니다. 헬스장에 간다. 헬스장에 가서 40분간 러닝머신을 빠르게 걷고 땀을 쭉 빼고 온다. 요즘엔 천국의 계단을 타서 땀이 정말 비 오듯 쏟아진다. 그리고 집에 가서 또 밀려오는 우울감과 공허함과 싸운다.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이상한 사람 같다. 이상한 사람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뿐만 아니라 이직 준비를 위해 한동안은 회사에 다니면서 정보처리기사 자격증 준비를 했다. 그리고 합격도 했다. 올해는 A420-30장 분량의 단편 소설 공모전에 응모하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꾸준히 빠지지 않고 진료받으러 오는 것이 엄청 의미가 있다고 재차 강조하셨다. 그 말에, 내가 머쓱해하며 ‘제가 딱히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이벤트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라서 퇴근하는 길에 들르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 타고난 성실성은 단순 습관이 아니라 ‘생(生)에 대한 의지’였나보다. 어린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살기 위해 보호자의 손가락을 꽉 움켜쥐듯.

이런 나를 보고 의사 선생님은 내가 본능으로 가진 ‘생(生)에 대한 의지’를 느꼈나 보다. 여기에서 ‘이 사람이라면 변할 수 있겠다’라는 가능성과 희망을 본 것인가 보다. 그래서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계신 건가보다. 그제야 의사 선생님이 하셨던 말들의 의미가 조금 이해가 갔다.

‘이 사람 살고 싶어 하는구나. 너무나 살고 싶어 하는구나.’라고 그렇게 느끼셨나 봐.


처음에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나의 이 무서운 ‘생존 본능’을 말이다. 본능이 만들어 놓은 ‘살고 싶은 나’와 우울증이 만들어 놓은 ‘그저 쉬고 싶다는 나’가 서로 공존하고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의사 선생님은 ‘살고 싶은 나’를 희망 삼아, 나의 이 ‘포기하고 있는 나’와 홀로 싸워 오셨던 것 같다. 이 깨달음은 오늘에서야 하게 됐는데, 그렇다 보니 그동안 그분을 혼자 싸우게 두었던 걸까 싶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이제야 나는 인정한다.

방법이 효율적이거나 좋다고는 할 수 없을지언정, 나는 살아가려 애써왔다. 이것 또한 나의 의지이고 나 자신이 맞다. 본능이 만들어 놓은 ‘나’라 할지라도.


그렇게 늘 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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