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중독자의 책이야기
★ 경계선에서 머뭇거리는 일본인의 초상화 - 『도쿄노트』
1.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히라타 오리자의 언어
히라타 오리자의 『도쿄노트』는 독특하다. 담담한 것 같아도 담담하지 않고 평범한 것 같아도 평범하지 않다. 그 이유에는 바로 정지된 감정선과 인물의 행동에 있다. 움직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감정들을 무덤덤하게 드러낸다. 갈등의 증폭이나 외부인에 의한 새로운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 툭 던지듯이 등장하는 사건들 역시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가거나 작품 자체에 대해 커다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공간과 인물은 정지된 감정들 만을 보여준다.
히라타 오리자의 희곡집 『도쿄노트』에는 세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도쿄 노트」, 「모험왕」, 「잠 못드는 밤은 없다」 모두 공간의 변화가 없다. 또한 공간을 사용하는 인물 역시 크게 변화가 없다. 박물관, 게스트하우스, 숙소형 아파트 모두 공간으로서 존재할 뿐 인물의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지 않는다.
히라타 오리자의 공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의미란 바로 stop에 있다. 멈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작품 속에 인물들은 공간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공간 안에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히라타 오리자가 작품을 쓰기 시작할 때 일본 상황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당시 일본 사회는 변화의 기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세대의 교체, 역사의 교체, 그리고 서양과 동양 사이에서의 경계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작품 속에 인물들은 각자가 살아온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 「모험왕」에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갈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잠 못드는 밤은 없다」에서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두 작품의 공간은 외국이다. 그리고 등장인물들 모두 외국에서 떠돌이 인생을 살고 있다. 이들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거나 일본으로 더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다. 평생을 살아온 일본에서 희망이 없고 어떠한 대우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일본에서 획일화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 모두가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경계선에 머물고 있다.
「모험왕」과 「잠 못드는 밤은 없다」의 두 작품 속 공간은 외국이다. 그런데 이 공간은 영원이 없다. 즉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래서 떠나가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이 오기도 한다. 결국 이 공간은 언젠가는 떠나가야 할 곳이지만 어디로 떠날지 모른다.
반면 「도쿄노트」는 두 작품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작품 속 미술관은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공간이 아니다. 이 곳은 전시된 그림을 보러 오는 손님들이 주 대상이다. 그런데 작품속에서 미술 이야기는 크게 등장하지 않는다. 장소도 미술관이 아닌 휴게실이다. 그 공간에서 미술품을 보고 잠시 쉬러 오면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동적이지 않다. 자신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나간다. 그러나 그 담담한 일상 속에 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 후회, 이혼, 슬픔 등 다양한 감정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정지된 움직임 속에서 전달이 된다.
그래서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아주 독특한 작품이 된다.
2. 정지된 감정 속에서 방황하는 인물들 그리고 히라타 오리자만의 언어
히라타 오리자는 『연극입문』에서 대사에 대해 작가의 세계관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도쿄노트』에 실린 세 작품을 보면 희곡작법에 대한 그의 가치관이 응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있어 대사란 작가의 메세지 또는 작가의 가치관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가장 리얼한 대사라고 할 수 있다.
『도쿄노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암전이 적다는 것이다. 대부분 장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사건으로 나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히라타 오리자의 경우 암전을 통해 장의 변화를 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음향, 조명의 효과를 주지 않는다. 또한 특정한 인물의 등장과 대사 또는 하나의 커다란 줄거리를 통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고 여러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진행이 된다. 그러나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통일된 이야기로 진행되지 않는다.
「모험왕」과 「잠 못드는 밤은 없다」 의 경우, 하나의 공간과 이유가 명확하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각 이야기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다. 그러나 「도쿄노트」의 경우 인물들의 목적이 다르다. 미술관에 전시된 미술품을 보러 온 손님들이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다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유미와 요시에의 등장과 동시에 다른 인물이 등장하여 각자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모아지지도 않는다.
왜 이런 설정을 한 것일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일본에서 변화가 이루어지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일본인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확장되지 못하고 정지되어 있다. 그래서 마치 영화의 스쳐지나 가는 장면처럼 모든 사람의 이야기와 장면이 스쳐지나간다. 결국 아무런 의미 없이 지나가는 엑스트라처럼 이들의 대사도 스쳐지나 가듯 지나간다. 경계선에 서 있지만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버린 이들의 말은 변화되지 않는 공간과 새로운 사건 없이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서로 이어지지 않는 대사들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작가의 가치관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표현될 수 있다. 히라타 오리자의 작품은 히라타 오리자가 아니면 표현하기 힘들 수 있다. 연출가의 능력에 따라 자칫하면 지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 작품이 의미가 있는 것은 작가의 가치관과 작가가 리얼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도쿄노트
히라타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