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우 Apr 21. 2019

시대를 체화해 소리치는 영화

이창동 감독 _ <초록 물고기> (1997) 


 성장은 비극이다. 배워가고 알아가고 경험하며 태초의 순수함은 사라져 간다. 회피할 수도, 아무런 생채기 없이 삼켜버릴 수도 없는 이 성장은 불가항적이다. 자아를 찾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쓰라린 사춘기의 통증을 느껴야만 한다. 아픔을 태우며 이뤄지는 개인의 비극적인 성장 알고리즘은 물리적인 세계에서 또한 같은 원리로 작동된다. 국가의, 체제의, 경제의 성장을 위해 전쟁을 치르고, 민주화 운동을 행하고,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며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했던가. 이창동 감독은 꾸준히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러한 성장의 비극을 조명해 왔다. 그는 우리가 잊어버렸던 시대정신, 간과했던 개인의 삶을 스크린 위해 재현해내며 관객들에게 회고와 성찰을 요구한다. <박하사탕>을 통해 지난했던 근대화의 비극을 반추하고 <오아시스>와 <밀양>, <시>를 거치며 시대 속을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과 정체성을 탐구하기에 이른다.  이 심대한 필모그래피의 시작점에는 <초록물고기>가 있다. 한국형 장르영화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이 기념비적인 작품에는 이창동 감독의 주제의식과 표현방식의 원형이 새겨져 있다. 투박하지만 짜임새 있는, 장르적이지만 현실적인. 그것은 내게 하나의 시대이자 한 명의 인물처럼 다가왔다. 영화는 논리적인 구조와 인간적인 묘사를 통해 시대를 반영하고 시대를 체화하고 있었다.   

  

장르의 골격 위에 리얼리즘의 살갗을 입히다     


 <초록물고기>는 갱스터 느와르라는 장르의 골격을 지니고 있다. 장르 속에는 일정한 규범이 존재한다. 돈을 벌기 위한 주인공은 조직에 몸을 담으며 상승욕구를 느끼다 파멸하고 여자 캐릭터는 남성들에 의해 도구처럼 사용된다. 조직보스는 정감과 의리를 갖춘 가장처럼 보이지만 철저히 주인공을 이용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이곳이 피도 눈물도 없는 폭력의 세계임을 일깨워준다. 이는 단순한 장르적 장치를 넘어 주제의 표현으로 이어진다. 20세기 후반 한국에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열풍이 불어 닥쳤다. 경제개발은 국가와 국민의 최고 이념이 되었다. 누가 성장이라는 목표에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농촌에는 공장이 들어섰고 달동네 위에는 아파트가 세워졌다. 이로 인해 많은 소시민들은 이주민으로 전락했다. 이와 같은 맹목적인 무한성장의 시대 그리고 계급상승을 위해 내달리다 파멸에 이르는 갱스터 느와르의 특성은 어떤 서늘한 교집합을 갖는다. 하지만 <초록물고기>는 여느 장르 영화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카메라는 휘황찬란한 액션 씬과 복잡하게 얽힌 인물관계 대신 적막과 소란이 혼재된 미묘한 공간의 분위기와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들을 담아낸다. 이창동 감독은 이렇게 장르 영화 위에 리얼리즘을 올린다. 리얼리즘 사조의 작품답게 딥 포커스 (Deep Focus)로 인물과 풍경을 이질감 없이 포착하고 자연광을 사용해 현실감을 극대화 하지만 <초록물고기>에서 빛나는 리얼리즘의 정수는 따로 존재한다.

 첫 번째는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이다. 나란히 서서 오줌을 갈기는 막동이 형제 넷, 기차 안에서 음료수 병에 적힌 글자들로 웃음꽃을 피우는 남녀, 살인을 저지른 뒤 온 몸을 부르르 떨며 큰 형에게 전화를 거는 막동, 닭을 잡기 위해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가족들의 풍경은 영화라는 가상과 현실의 벽을 무너뜨리며 세밀하고 정교하게 삶을 재현해낸다. <초록물고기>에서는 아주 짙은 사람냄새가 진동한다.

 두 번째는 지정학적인 공간이다. 영화 속의 세계는 공간을 매개로 현실로 연결된다. 군대를 제대한 막동이는 변해버린 일산의 고향집과 옛날 막동이 가족 것이었던 땅 위로 높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마주한다. 셋째 형은 이제 자신이 살았던 곳을 점령한 타지인 들 에게 계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신세다. 배태곤의 활동구역이자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는 영등포는 실제 90년대 조직 폭력배들의 이권 다툼이 일어났던 공간으로써 영화의 핍진성을 높여준다. 이처럼 <초록물고기>의 공간들은 인물들이 행동하는 배경의 기능을 넘어 인물의 특성과 영화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명징한 은유로써 작동하고 있다.    

 

순수의 몰락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씌게 된 백광호(박노식)는 박두만 형사(군부 독재로 은유되는 인물)로부터 도망치던 중 그만 기차에 치여 목숨을 잃고,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김영호(설경구)는 기찻길에 뛰어들어 자살을 결심하곤 “나, 다시 돌아갈래!” 절규한다.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질주하는 기차의 속성은 이렇게 산업화, 도시화, 혹은 어떤 성장의 이념을 대변하는 메타포로 종종 영화 속에 등장했다. <초록 물고기>의 첫 장면에서도 기차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기차는 언뜻 여타 영화과는 다른 의미를 띄는 듯 보인다. 막동은 기차에서 미애의 장밋빛 스카프를 얼굴로 받음으로써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가기 시작한다. 처음 화장기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미애와, 막동은 다시 한 번 기차에 오른다. 막동은 자신의 순수의 징표인 초록물고기(버드나무)가 담긴 흑백 사진을 미애에게 선물하고 미애는 막동에게 첫 키스를 선사함으로써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이처럼 <초록물고기>의 기차는 순수의 공간으로 작동된다. 하지만 기차가 지닌 산업화의 함의는 이내 섬뜩하게 살아나 공간을 진동시킨다. 고정되지 않고 항상 어디론가 이동하는 특성을 지닌 기차 안에서 꽃피는 사랑에는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씬은 순수의 파괴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기차 데이트 후 돌아온 미애는 태곤을 만난다. 이 때 태곤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는 어항이 놓여 있다. 물고기 없이 텅 비어 있는 어항. 태곤은 미애에게 어차피 다시 돌아올 거 왜 맨날 기차를 타냐 추궁한 다음 “넌 나한테서 도망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는 차를 타고 옥신각신하는 가족들 주위를 맴도는 막동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옷이 벗겨진 미애의 등에 난 수많은 흉터들은 태곤의 선언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는 듯 보인다.

 배태곤은 막동이에게 두 번 꿈을 묻는다. 하지만 질문의 진짜 의도는 막동이의 꿈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 첫 번째 질문에 앞서 배태곤은 막동이에게 자신이 꿈을 갖게 된 과거를 설명하고 두 번째 질문에서는 자신의 꿈을 이룰 도구로써 막동이의 꿈을 이용한다. 부와 권력의 확장, 가족의 화합과 평안한 삶. 두 사람의 꿈은 애초에 동행할 수 없는 꿈이었다. 하지만 막동이는 가족들과 함께 모여 조그마한 식당하나 같이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한다. 배태곤의 말마따나 그런 일은 공짜로 일어나지 않는다. 꿈은 희생을 먹어야만 이뤄지는 것일까. 막동은 순수의 지표이자 사랑의 분신인 장밋빛 스카프를 라이터로 태워버린 뒤 살인을 저지른다. 자신을 집어삼킨 선택 속에서 그는 온몸을 부들거리며 자기 환멸을 느낀다. 그렇게 피칠갑이 된 막동의 얼굴에는 성장의 비극이 어른거린다. 그는 이후 그의 순수와 가장 닮아 있던 지체 장애인 큰 형 (초반부 막동이 전신거울을 볼 때 큰 형이 거울 옆으로 프레임 인 한다.) 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투명했던 어릴 적 초록물고기를 회상한다. 잡으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던 초록물고기는 기억처럼 그렇게 사라져 간다.      


우리를 향해 소리치는 엔딩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 막동의 가족들은 막동의 바람대로 한 데 모여 식당 하나를 하며 단란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달라진 것은 가족들의 생활 방식뿐만이 아니다. 포장된 도로 위로는 대형 트럭들이 지나가고 뻥 뚫려 있던 후경에는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다. 배태곤과 미애는 누가 봐도 평범한, 우리와 닮아 있는 중산층의 모습으로 식당을 방문한다. 그리고 순수가 사라진 불신의 시대, 가족들은 중산층 부부에게 힘겹게 닭을 잡아 목을 치는 것을 증명한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던 배태곤은 옛 사진들을 보고 아이디어가 괜찮다며 칭찬을 한다. 그는 과거 자신의 죄의식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미애는 다르다. 그녀는 막동의 사진에 담겨 있던 버드나무를 보고 목 놓아 울기 시작한다. 땅을 치며 슬픔을 삼키며 후회한다. 하지만 하늘에 아른거리는 초록물고기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드려져 있다. 태곤과 미애가 떠난 뒤 카메라는 버즈 아이 뷰로 너무나도 평화로운 마당의 전경을 비추며 줌아웃 된다. 그리고 한 번 멈춘 뒤 틸트업 하며 가려져 있던  아파트 단지와 휘날리는 버드나무 잎을 비춘다. 엔딩은 말한다. 처음 줌 아웃을 멈춘 지점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평화로운 성장의 결과라고, 하지만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올리면 그 성장 속에는 우리가 간과한 비극이 숨겨져 있다고 언지한다. 영화는 말한다. 흑백 사진을 보며 과거를 추억하되 성찰하고, 불신 시대가 다시 순수의 초록물고기를 되찾을 수 있을지 고찰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뒤흔든 맹목의 시대정신을 반성하며 성장의 비극을 직시하라고.

 이처럼 <초록물고기>는 살아 숨 쉬는 인물과 공간, 그것들을 통해 발현된 차갑고 날카로운 계몽의 메시지를 지닌다. 영화는 장르와 리얼리즘으로써 시대를 체화한 뒤 영향력을 가진 엄연한 언어로써 소리친다. 더불어 <초록물고기>가 지닌 뚜렷한 시공간의 음파는 주제의식의 차원을 넘어 이전 시대를 다음 시대로 전달하는 영화라는 매체의 존재이유를 일깨워준다. 시대의 정체성은 영화로 인해 되살아나고 영화는 시대의 정체성을 통해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얻는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우상> _ 딸딸이 영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